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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25. 2024

견뎌라, 시네마일지니_<가여운 것들>

<Poor Things>(2023, 요르고스 란티모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친구와 다르덴 형제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면서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다. 그 때 대화의 테마는 <약속>이나 <로제타>, <더 차일드>에서 보여주었던 결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진보하였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확실히 <내일을 위한 시간>의 결말은, 깊은 바다 속에서 한 줌의 공기 없는 절망의 상태로 끝맺음 했던 전작들에 비해 차분하고 온화한 인상이 있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했고,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이 변화에 대해 사회가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었고, 감독들이 나이를 먹어서 사회에서의 자리나 혹은 계급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하는 이도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영화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전으로 삼았을 만큼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던 감독들이 고여있지 않고 변화했다는 것이고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 모습들이 서사와 스타일 상에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 점이 진정 위대한 측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리와 로키타>가 다시 예전 같은 느낌의 결말로 돌아갔을 때, 인간 자본주의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내다보는 기분이 들어 몹시 비극적이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작가주의 감독이다. <송곳니>부터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그리고 <가여운 것들>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는 서사 궤도가 있다. 일면 문명인을 불쾌하게 자극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고 특히 우화의 구성을 차용하기 때문에 여러방면에서 인상비평하기 좋은 텍스트를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현대 관객의 취향 가운데 서사 속에 어떤 코드를 삽입하여 퍼즐을 풀거나 정답을 찾아내는, 혹은 지식 탐구의 성취를 유도하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그런 경우라면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매력적인 텍스트로 다가올 법도 하다. 물론 그가 다루는 인간의 근원적 경향성의 적나라한 표현들 때문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테지만.



<가여운 것들>은 이러한 전작에 비해서는 조금 더 테마를 명징하게 그려냈다. 판타지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현실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서사 구성이 우화의 느낌을 담은 판타지로 출발하는데 그 끝은 보편적 카타르시스를 남기는 관습적인 드라마에 안착하는 방향으로 설계 되어 있다. 나는 이 접근이 어떤 테마를 보다 폭넓게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전략적 태도처럼 느껴진다. 시네아스트적 기질이 엄격하게 서려 있던 톤앤매너가 보다 관습적이고 핍진적인 문법과 융화된 것 같은 기분. 쓰고 보니 지나치게 인상적인 코멘트이긴 하지만, 아무쪼록 이러한 시도는 다르덴의 선택만큼이나 진보적이고 다방면에 유효하며 영화 매체 본연의 가치를 드높이는 아름다운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아래 세 문단에 강한 내용 스포 있습니다)

서사적으로는 벨라 벡스터라는 여자 주인공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동화되는, 그러니까 일종의 우화에서 선택했던 것처럼 거리두기를 하거나 블랙코미디 혹은 풍자코미디의 연장선에서 달리는 인물이 아니라, 지성체가 되면서 관객들과 감정적 동화를 이루어내는 인물로 진행한다는 점이 특징적인 측면이다. 블랙코미디의 인물은 윤리적 성찰을 하지 않지만 벨라 벡스터는 성찰하고, 풍자코미디에서 인물이 사회를 바꿀 수 없지만, 벨라 벡스터는 바꿔버린다. 사실 어쩌면 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이기 때문에 벨라 벡스터가 나중에 구 남편에게 총으로 살해 당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상 외의 전개였고, 드라마 트루기 안에서 깔끔한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마무리였다.



이와 관련하여, 서사 구조상 두 번째 발견, 그러니까 본인이 스스로 몸을 파는 여성이 되고자 마음먹고 그 일을 통해 나라는 존재와 여성에 대한 인식, 자존감, 주체성을 깨닫는다는 부분이 상당히 훌륭한 지점이었다고 본다. 내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 맥락도 좋고 전개 타이밍도 나무랄데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발견, 그러니까 절체절명의 위기가 도래해야 하는 순간에 다가오는 발견, 벨라 벡스터가 원래는 어떤 여성이었는가 그 남편은 누구였으며 얼마나 나쁜 남자 였는가가 드러나는 그 지점이 또한 백미였다.



통상적으로 긴 이야기에서 마지막 발견은 주인공 결핍의 핵심을 관통하는 최대 위기로서의 발견이며, 적수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순간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이러한 작법의 단계에서 볼 때 옛날 남편을 만나는 마지막 시퀀스는 벨라가 기억을 잃었다는 문제, 과거가 미스테리에 쌓여있다는 그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견고한 구조적 개연성을 획득케 했고, 결국 관객과의 감정적 동화에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 완성되도록 이끌었다. 게다가 적수 또한 벨라가 가장 원하는 여성-주체성의 상실을 누구보다 잔인하고 비열하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완벽한 인과율을 보여준다. 벨라가 이 위기를 이겨내는 방식, 즉 솔직함과 담대함, 전진하면서 숨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그 방식 역시 욕망 실현을 위해 가장 힘든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주인공의 능동적 태도를 교과서처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원작도 같은 내용일지 빨리 읽어봐야겠다)





시나리오 구조의 견고한 완성을 통해 도출된 결과는 명징한 테마의 전달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극적 카타르시스, 그리고 그 감정의 크기와 비례하는 흥행성적이다. 2024년 2월 말 현재 이 작품은 전 세계 흥행 1억 달러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고(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아직 조금 부족하고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미 1억 불을 돌파했다. 제작비와 대비했을 때 2배가 넘는 성과이다) 오스카 시상식이 끝나면 수입은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면 우화를 사랑하는 시네아스트의 훌륭한 '하이브리드'적 선택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여운 것들>에서 그러나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 촬영이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하면 언제부터인가 떠오르는 것이 극단적인 광각렌즈다. 특히 <더 페이버릿> 때문에 그렇게 인식되는 것 같긴 한데, 당시 특수 8mm 렌즈를 굳이 써가면서 촬영한 여러 씬을 봤을 때는 - 다소 과시적인 느낌도 있기는 했으나 - 그 기나긴 복도를 걸어와야 하는 여왕의 발걸음의 무게 같은 것들을 나타내려는 인상들이 있었다. 복도는 길어야 하고 그만큼 걸음은 과장되어야 하며, 여왕의 자리로 향하는 그 길이 다소 왜곡되고 불편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더 페이버릿>이 좋았던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대단한 망원렌즈로 인물에게 밀착하여 여왕의 광기를 영화 매체 고유의 양식적 특성으로 다채롭게 나타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결코 촬영이 단조롭거나 전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가여운 것들>의 초중반부 까지는 다소 극단적 광각렌즈의 사용이 과시적으로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공간의 왜곡을 꾀해야 하는 서사적 이유가 잘 보이지 않았다. 좁은 마차 안에서나, 벡스터 박사의 연구실 내부, 집 안 계단 따위에서 나타나는 왜곡은 오히려 코믹한 거리두기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벨라 벡스터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운 초반부 흐름을 가져가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서 봤지만 그 당위성이 <더 페이버릿>만큼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후반부에 가서 왜 초중반부에 촬영 설계를 다소 유희적인 감각(개인적인 인상이다)으로 하였는지 정확히 설명한다. 폭력적인 전 남편과의 공간, 그 거대한 집 안 내부와 <시민케인>의 그것을 방불케하는, 숨막히도록 서로가 멀고 답답한 식사 자리에서의 광각렌즈는 폭력 그 자체였으며 왜곡된 공간 속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 벨라 벡스터의 무기력과 공포를 드러내는 도구였던 것이다. 카메라는 결국 공간이 여성을 위한 넓은 운동장이 아니라, 자아를 상실할 만큼 거대하고 경계가 잘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변질되는 순간들의 대비를 보여준다. 광각렌즈를 통한 과장과 왜곡은 더 이상 코믹하지 않고 역설적 공포로 전환된다. 나는 영화의 양식적 특성을 통해 테마를 드러내는 이 방식이 좋다. 시네마틱 하다는 표현이 다소 허황된 말처럼 들릴 때도 있지만, 이 정도 되면 어쩔 수 없이 <가여운 것들>이 정말 '시네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 스타일 요소 중 하나는 음악이다. 작품을 만들고 나면 편집 프로그램 타임라인을 쳐다보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속된 말로) '바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본인의 소스에 자신이 없는 연출자라면 누구나 해봤을 법한 생각이다.(음악을 '바르면' 대개 어색한 소스들을 임시방편으로나마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을 때가 많다...) <가여운 것들>은 대단히 양식적인 영화고 음악 역시 미장센 만큼이나 과시적으로 사용되기 딱 좋은 바탕을 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생각보다 음악이 절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화를 아직 한 번 밖에 못봐서 이 판단은 틀릴 확률이 높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쯤에서 음악이 나올 법 한데... 나라면 여기에서 음악을 깔았을 텐데... 하는 시점에 좀처럼 음악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단의 근거가 대단히 비루하긴 하지만 아무쪼록 음악의 사용 또한 카메라와 광각렌즈가 나타낸 그 효과처럼 관객을 극에서 멀어지게 했다가 다시 후반부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유려한 흐름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스코어 자체에도 테마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상당한 음율적 계산이 느껴진다.






수다를 떨고 싶은 주제는 이외에도 많다. 아직 엠마 스톤이나 윌렘 데포, 마크 러팔로, 라미 유세프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이 영화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 그 성 계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를 잘 보여주는 로우앵글과 하이앵글의 미끈한 활용에 대해서도(렌즈 뿐만이 아니라) 뜯어볼만한 덩어리가 많다. 줌-인과 줌-아웃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수다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렇듯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법이다. <더 랍스터>나 <더 페이버릿>을 통해 세계적인 거장으로 떠오른 작가가 고이지 않고 변화하고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패턴을 취하고 있다는 그 모습이 경이롭다. 마틴 스콜세지가 <분노의 주먹>이 성공한 이후, <좋은 친구들>을 만들면서 성공했던 방식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고 하는데 훌륭한 감독들의 이러한 노력이 결국 시네마의 생명력을 늘리고 나아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가여운 것들>은 특히나 더 그렇다. 사실 초중반이 흐르는 동안 영화는 대단히 노골적이고 잔인하다. 여성의 음부나 남성의 성기, 그 외 징그럽거나 더러운 인간의 장기(Organ), 끔찍한 혼종 생명체, 숨기고 싶은 욕망의 유령들이 무수히 튀어나오며 관객에게 견뎌야 하는 순간을 강요한다. - 나는 이 작품을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관람했는데, 정말 맨 앞 A열도 꽉찼을만큼 완전한 매진 상영관 안에서 감상하는 경험을 했다. 적나라한 표현들이 예상치도 못하게 드러나는 순간 얼마나 기분이 묘하던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알랭 기로디의 <호수의 이방인>을 매진 상영관에서 본 경험 다음으로 당혹스러운 감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들을 견디면, 왜 영화의 초중반에 정신없는 광경들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리둥절하고 황망하기까지한 노출들을 왜 목도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완벽하고 아름다운 매듭을 바라보기 위해 관객들은 견뎌야 한다. 견디기 위해 가장 좋은 공간은 역시나 어둡고 두터운 출입문으로 봉쇄된 극장이다. 아무 때나 스페이스 바를 눌러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또 좌뇌로 영상을 보고 우뇌로 인스타그램을 하는 현장 속에서는 <가여운 것들>을 좀체 견딜 수 없을 것이 뻔하다. <가여운 것들>은 그래서 더욱, 제대로, 시네마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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