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팬티

시시콜콜한 짧은 이야기

by 레트너

세상에 그럴 수 있을까.

마주 앉은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았고 경험도 했다.


남이 입던 속옷을, 그것도 팬티를 입을 수가 있는 건가요.

아무리 남의 것이 탐난다고 할지언정, 입던 팬티를 훔쳐간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이것이 이야기의 주제였다. 제법 변태스러운 상상들이 오고 갔다.

여기서 '남' 이라고 함의 관계성은 동성간, 특히 남성과 남성간을 의미한다.


그럴 수 있어. 난 그런 거 봤어.

라고 하자 여성 동지들이 기겁을 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여도 남의 팬티를 입는다니 너무 찝찝한데?

하지만 우선 나는 남자 기숙사에 있던 시절 팬티를 포함한 내 옷가지 전부를 도둑맞은 적이 있고,

남성과 동거 하면서 상대방의 팬티인 것을 (대체로) 모르고 헷갈리는 바람에 입은 적이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아는 이야기로는 군대에 있을 때 빨래감이 헷갈려 상병과 일병이 한동안 서로의 메리야스와 팬티를 바꿔 입고 다녔는데 나중에 주기된 것을 보고 교환하였지만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어떤 남성 아이돌 그룹이 숙소 생활을 하는데 타인의 팬티를 빌려 입었거나 훔쳐 입었거나 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라고 본다.

사람마다의 특성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러한 팬티썰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 것을 입을 수가 있나요? 했을 때는. 글쎄 그 속옷이 깨끗하다면? 그리고 내가 마침 입을 속옷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고, 또 그 상대방이 원체 깔끔하거나 뭐, 아니면 처음보는 비싸고 탐나는 속옷을 입었거나 한다면 거부감이 덜하지 않을까 했다.

너희는 그런 일 없어? 라고 하니,

너희는 하늘에서 문어가 떨어진다는 소리 같은 것을 들은 사람 마냥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깐 20년전 과거를 생각했다. 기숙사에 살 때. 나는 내 물건을 두 번 도둑맞았다.

우선 목욕바구니를 통째로 잃어버린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다. 그 안에 비싼 물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샤워젤도 새거였고 샴푸도 비싼 거였다. 그 밖에 몸에 바르는 거나 향기 좋은 컨디셔너, 뭐 그런 것들이 잔뜩이었는데 통째로 절도 당했다.

칠칠치 못한 내 잘못도 있긴한데, 그래도 공동 샤워실에서 씻고 옷입고 나와서 내 방에 들어와서는 멍 때리다가 '아 맞다 나 목욕바구니 놓고왔네?' 하고 다시 갔는데 그 십분 남짓한 사이에 바구니가 온통 사라진 것이다. 샤워젤이 새거 였던 게 특히 억울해서 찾아달라고 사감실에 읍소도 해보았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도둑은 빨래가 다 된 내 옷들을 훔쳐갔다. 그 안에는 메리야스도 있고 속옷도 여러벌 있었다. 세탁을 다 하고 탈수까지 끝났는데 제 때 꺼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누군가 세탁기를 쓰러 왔는데 그 안에 탈수가 다 되어 세탁기 통에 착- 하고 돌돌돌 달라 붙어 있는 옷가지들이 있으면 밖에 잘 꺼내놓고 자신의 세탁을 한다. 그 때 내 옷도 그렇게 밖에 나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수업이 끝나고 '아 맞다, 나 빨래 안 빼고 나왔네.' 하고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갔는데 내 빨래는 온데간데 없고 남의 빨래들만 세탁기 안에서 돌돌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속옷을 가져가서 어디다 쓰게? 왜 가져가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 정도의 생각은 든다. 개연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만약에 나라면 어떤 이유로 모르는 남의 팬티를 가져가게 될까?

같이 사는 친구라면, 혹은 그 외 어쨌든 아는 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또 모른다. 거기엔 더 인과적인 문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의 팬티가 놓여있는데 그것을 동성간에 가져가고 돌려입는 다면 그 생각의 발로는 뭘까.

하지만 뭐. 뭐가 됐든, 내가 그런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해도, 뭇남성의 팬티 도둑질이라는 게 역시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다. 그냥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 입을만한 빤쓰가 없는데 이 놈 거 좋아보이네? 하면 또 그냥 입을 수 있을지도. 자라오면서 겉옷과 속옷을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이 선택해 주는 대다수의 남성들의 경험을 생각해 보았을 때, 속옷을 획득한다는 것에 대한 관념은 '속옷'이 아니라 '획득'에 무게를 두고 있어 지나가다 땅에 떨어진 귤 따위를 발견한 것처럼 상큼하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쪼록 이야기는 이러한 잡스럽고 지저분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팬티를 가져간 자, 죽음을 맞는다는 태그라인 정도가 어울리는 이야기, '킬링 팬티'.

누군가는 천박함이 너무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감은 마음에 든다. 거센 소리의 향연(ㅋ,ㅍ,ㅌ).

그에 걸맞는 거센 천박함.

내용은 이렇다. '링' 바이러스가 비디오 관람을 통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가서 그들 모두를 망자로 만드는 것처럼. <팔로우>에서 성관계를 하면 알 수 없는 세대의 유령이 나타나 관계한 자를 무덤으로 이끄는 것처럼. '킬링 팬티'는 그 팬티를 입는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어떤 남성을 질투하거나 동경할 수 있다. 혹은 자신의 변태적 감각을 숨기거나 외면하는 자 일 수도 있다. 이런 자들은 대개 그 결핍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보통은 사회 규범안에 알맞은 모습으로 들어 있는 남성이다. 사람들이 팔 뻗으면 속옷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 안에 있어야 하니 배경은 남자 기숙사나 공동숙소 정도면 좋을 것 같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일 수도 있고, 멤버가 많은 아이돌 그룹내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여튼 누군가 이상한 마음으로 팬티를 훔쳐 입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팬티는 이상하게 다른 어떤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들거나 눈 멀게 만들며 계속 아무개 남성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은 연쇄된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출동하는 것이 주인공 남자다. 이미 팬티를 입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링 처럼 다른 이에게 전파하면 내가 깨끗해 진다는 설정? 팔로우 처럼 내가 그와 육체적 성애를 나누어 저주를 떠안는다는 설정? 뭐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입고 빠는 것 외에 다른 쓰임새가 없는 것이 팬티의 삶인데 그것으로 90-100분짜리 서사가 나오려면 주인공과 희생자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고 또 그 팬티 안에는 어떤 테마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일지. 어느 정도는 호러 장르의 괴팍한 도치같은 것은 이루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파스빈더 같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다면 편지를 보내 이런 아이디어는 어떠시냐고 물어볼 수 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킬링 팬티 따위를 상상하는 것보다 더 무익한)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지금도 어떤 남성은 그가 속한 남성 집단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다른 남성의 팬티를 입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 남성 병폐의 전염이 있다한들 그것이 앞뒤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그렇게 네가 입고 또 그를 질투하는 다른이가 입고, 좋은 팬티 명품 팬티(킬링 팬티가 있다면 천상천하유아독존급의 팬티여야 할 것이다) 입고자 하는 다른이가 입고, 그를 경멸하는 다른 남자가 입고, 부주의한 남자가 우연히 입고, 결국 그를 사랑하는 남자가 마지막에 입음으로 해서 이야기가 마무리 될 것 만 같다. 팬티의 저주를 끝내는 그 마지막 남자는 누가 될까? 모르긴 몰라도 내러티브가 요구하는 것, 그러니까 그 마지막 남자는 (통속적으로) 거세된 남성이나 남성 집단 내 폭력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한 인물이 될 것이다. 보통 남성이 보통 남성을 구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결국 킬링팬티는 남성안에 도래하는 썩어버린 지점들을 파고드는 팬티가 될 것이다. 하다하다 이제는 속옷에 까지 깃들어 버린 귀신이라... 황당무계한 것 같지만, 실제로 없는 일은 아니다.


귀신이나 악령은 모든 곳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킬링팬티가 흐르고 있다.

지금도 자신이 그 속옷을 입었는지 모르고 있는 한 남자가 서울 시내 어느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팬티 한 장 때문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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