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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Oct 21. 2017

스물에서 서른으로

이십 대에 지질지질하고 서로 못볼꼴 숭한꼴 이해 못할 꼴을 보았던 사람들이 철이 드는지 때가 그리된 건지, 하나둘씩 결혼을 했다. 바람난 수캐 같던 어떤 오빠 A도 짝을 찾고, 결혼에 회의적이던 어떤 오빠 B도 결혼을 하고, 난봉의 끝을 보이던 친구 C도 그렇게 싫다던 애 낳고 잘 산다. 언뜻 보면 이전에 방황, 지분거림, 지랄들이 결국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격렬한 준비운동이었던 것 마냥 잠시 동안의 평온에 머무는 것 같다. 그럴 '때' 가 되었다는 판단은 어느 시점에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지 못했던 시점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세 달 뒤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먼저 미국에 가 있을 J와 같이 있기 위해 역삼으로 임시거처를 옮겼다. 졸업 후 취업이 어려워 잠시 머물려고 했는데, 취업 이후에도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 서울 할머니 댁에 객식구로 7년을 살았다.  7년을 살았던 방을,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다시 들렀다.


방은 여전히 책들과 낙서로 가득 찬 종이 냄새로 그득했다. 손으로 남기는 기록에 애착이 강해서 대학 때부터 매해 쓴 일기장부터 직장에서 회의할 때마다 끼적거렸던 노트, 그리고 드문드문 오고 갔던 친구들과 손편지까지, 좁은 방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김치냉장고를 옮겨야 하는데 손이 없어서 못했다고 나를 기다렸던 할머니가 어찌나 애틋하던지, 자리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 김치통을 서너 번을 뺏다 넣었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치미는 짜증도 잠깐의 불씨처럼 지나가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기어코 짜증을 내고 말았을 거다. 오랜만에 집에 온다고 오징어볶음에 조기구이에 배춧국까지 끓여두신 정성에 마음이 계속 짠했다. 매번 먹는 거만 하다가 누군가의 음식을 챙겨주는 걸 해보니까, 밥 세끼 든든히 챙겨주는 일이 얼마나 성실한 일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약간은 게으르다.) 그 성실함으로 밥을 차려주던 할머니의 손이, 엄마의 손이 결혼을 앞두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고운 것 같다.


일터에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면서 버스에서 울었던 날과 방에서 밤새 끄억끄억 운 날이 며칠인지 샐 수도 없이 많다. 제대로 지나온 게 맞나 생각하게 되는 어둡고 꼬여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밀리듯 떠밀려 갔던 이십 대의 날들이 거리 곳곳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다시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어느 순간으로 갈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하겠다.  청춘이라는 건 그 자체로 아름답고 인정받는 빛나는 시절이 아니라, 자기 그릇에 깨지며 낯선 것들에 부딪혀보는 시간이다. 해서, 평생을 청춘으로 보내는 것이 인생으로 치자면 가장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 이라. 다만 그러한 '깨짐'을 집중적으로 강요받고, 또 실패에 타인과 세상이라는 절대적인 타자가 가장 관용적인 태도로 개인을 받아줄 수 있는 시기가 바로 대학시절과 사회초년생의 시절에 걸쳐진 이십 대이므로, 십분 활용하는 것이 훨씬 이로운 것 같다. 타자의 시선뿐 아니라 자존감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일들이 연쇄작용으로 발생하고, 이는 마치 해결되지 않은 과제처럼 그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이어진다. 나의 이십 대는 몇 가지 장애요인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장애란,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필사적으로 극복하고 싶은 무엇이라고 정의하자. 물리적인 요인이 아닌 몹시 심리적인 요인으로 지칭한다) 결과 먼저 말하자면, 꽤 운이 좋게도 무사히 지나왔던 시기였다. 모든 영역에서 좋은 성적, 눈에 띄는 좋은 성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좋은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을 힘겹게 옮겨놓은 것 같다. 이제 이 돌을 밟고 걷기만 하면 된다.


가장 큰 장애는 가족 그리고 돈이었다.

힘겨웠던 할머니와의 생활. 삼촌과의 싸움. 그리고 반복된 아빠의 무능력과 장녀로서의 압박감. 여전히 할머니와의 삶은 힘겹고,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돌이켜보건대, 학자금을 갚으면서 죽음까지 생각했던 건 더 이상 나아지질 않을 집안의 경제적인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컸다. 거기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돈이라는 게 참 무서운 놈이어서 단순히 없다는 빈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을 재편하는 권력까지 쥐어버린다. 아직도 이때의 콤플렉스나 두려움은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계속해서 맞서나 가야 할 문제다. 돈과 관련해서는 정말 웃픈 사연이 하나 있는데, 졸업학기에 있던 다단계 사건은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또 우습게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졸업 학기 때였다. 그 당시 남동생은 코와 코 사이에 뼈가 자라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아왔다. 돌팔이 의사의 오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 당시의 집안 사정은 몹시 심각한 것이었다. 당장 수술비는 없고 애는 살려야겠고 부모님은 애간장이 탔을 것이다. 심각한 건 나와 내 여동생도 잘 알고 있었지만, 코와 코 사이에 뼈가 자라는 남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병이 생겨도 그런 이상한 병이냐며, 이야말로 웃기고 황당하고 걱정스러운 상황이었다. 정말 친했고, 연인과도 같았던 친구 P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온 건 이 즈음이었다. 이 사정에 대해 토로하고, 말을 전달하는 사이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눈물이 나게 웃었다. P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바랐던 건 아니었고, 친하기도 했고 집안 사정도 다 아니까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P는 내게 열심히 전화를 걸어왔다. 한번 만나자고.... 그런데 이 만나자는 어감이 굉장히 쌔서, 본능적으로 저어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얘가 왜 이러지? 뒤늦게 고백이라도 하려고? 김칫국을 마셨기도 했고 혹여나 돈 빌려준다고 할까 봐 걱정도 되었다. 그런 시간이 지루하게 지나가던 어느 날, P를 만났다. P는 다단계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었고, 내가 돈이 필요할 것이니 같이 해보자는 얘기를 저녁 어스름 인천의 한 눅눅한 길거리에서 건넸다. 그때 난 내가 들어왔던 모든 욕을 P에게 퍼부었고, 다신 보지 않겠다며 역을 향해 토익책을 들고뛰었다. P가 우는 모습도 봤지만, 충격과 모멸감에 휩싸인 나였고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 아이도 아팠겠거니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P를 그 세계에서 끌어내리기엔 나의 삶도 녹록지 않았고, 그 아이의 고집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나는 P와의 연락을 끊기 위해 번호를 바꾸었고, 이후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P를 만날 용기는 없다. 한 십 년쯤 지나도 그때 그랬지 하면서 웃어넘길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라도, 세상이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하다면 괜찮게 살아있다면 그때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이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리듯,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듦을 치유해주는 사람이 늘 있었다. 이게 지금껏 살아오면서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이 행운이 내게서 멀리 달아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아빠의 무능력을 보상이라도 하듯, 엄마는 긍정으로 무장한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고 두 동생 모두 바르고 착하고 성실하게 자라주었다. 엄마는 늘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친구들, 한결같이 무던하게 있어준 친구들은 특히 더 많이 고맙다. 서울에 살면서 달아날 장소가 필요했고, 기댈 사람이 필요했는데 친구들이 있었기에 울타리 밖으로 달려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얼굴조차 희미해진 기억 속 고마운 사람들.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지 그저 먹먹하기 만 한 사람들의 얼굴도 있다.


내가 세상을 똑바로 못 보면, 세상도 나를 똑바른 각도로 대해주지 않는다는 건 큰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비뚤어진 세상을 밝게만 볼 수는 없다. 시선은 차가울 필요가 있는데, 차가워야 할 때 차가운 인정의 태도를 배우는 게 내겐 좀 버거운 일이었다. (지금은 인정의 문제는 '해야 만한다'라는 의무가 되었다. 그다음에 실천이든 어떤 말이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백화점 시계 매장에서 일할 때 일이다. 그때 나는 시간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동갑내기 여자 매니저, 그리고 담당자인 정직원분 셋이 둘씩 돌아가면서 업무를 봤었다. 판매직에서 일하다 보면 천박한 인간군상을 모두 만날 수 있다. 하필, 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돼서 그런 진상을 만난 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경험이다. 사회적으로 높은 어르신을 못 알아봤고, 나는 일처리에 미숙했다. 미숙한 나머지 매장에 컴플레인이 들어왔고, 이에 화가 난 동갑내기 여자 매니저는 매장에서 내게 아주 점잖은 척을 하면서 쌍욕을 퍼부었다.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힘들고, 수습할 경험치도 없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태어나 처음 듣는 욕까지 들으니 제정신 일리가 없었다. 결국 매장에서 울었고 이후 더 큰 욕을 들어야 했다. 내실수에서 비롯된 상황들이 대처가 안되고, 마음까지 추슬러지지 않는 순간은 매우 잦게 찾아왔다. 본격적인 일을 하면서도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었다. 실수를 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는 건, 때론 너무도 가혹하다. 머리로 안 것들의 무용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간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늘 자식에게 미안해하던 엄마와 늘 기대 있다가 잠시 멀어지는 동생들. 힘들 때마다 기댔던 사람들과 조금은 멀어지는 게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가족이라는 건 삶이 시궁창 같더라도 같이 버텨내면서 살아가는 관계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예민하고 아픈 부분을 보여야 하는 곳이다. 그런 가족이 지겨워 도망가고 싶었는데, 나는 이렇게 덜컥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버렸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사이도 없으며 사랑도 없다. 누군가의 사랑이야기가 완벽해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에 시궁창 같고 버텨내야 하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쫓기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를 상대와 맞춰가는 게 과제가 될 것 같다. 내어줄 부분이 있고, 지켜야 할 부분도 있다. 그건 결국 자기 깜냥이다. 완벽한 사랑은 없어도 아름다운 사랑은 있다. 사실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고, 별거 아닐 수 있다.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이고, 비껴감이고, 겹침이고 그 외의 모든 운동성일 뿐 인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야 살아있다고 느끼는 내겐, 그것들이 아직은 별게 아니라고 믿는 사소하고도 단단한 믿음이 필요하다.   


201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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