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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Oct 21. 2017

그리운 옥희씨

J와 함께 살기로 결심을 하고, 얼마 뒤 J가 죽어서 통곡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너무 소중한 것들은 잃을까 봐 늘 두렵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나는 일은 견디기 힘든 후회와 고통이 따른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져도 뚜렷한 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모의 죽음이 내게는 그랬다.  


바야흐로  영화 '써니' 가 대세이던 몇 해 전, 이모는 유방암 수술에서 회복 중인 상태였다. 오랜만에 이모를 보러 간 엄마와 나는 한결 나아진 이모 모습에 안도하며,  이모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써니를 보러 갔다. 감독판으로 상영 중이라, 19세 이상 관람가로 등급이 매겨졌는데 딸과 함께  보고 싶었던 이모는 영화관 직원에게 내일모레 죽을지도 모른다고, 마지막으로 딸이랑 영화 한 편만 보게 해달라고 거듭 호소했고, 같이 있던 엄마마저 얼굴이 화끈해져 그만하라고 됐다고 만류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엄마와 이모는 써니를 보러 갔고, 나와 사촌동생은 퀵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몇 해가 지난 올해 7월 이모는 세상과 안녕을 고했다. 모두가 불안하게 짐작했던 상황이었지만, 괜찮다고 했던 이모의 말을 믿었다. 이모를 보러 가는 길이 이모를 보내는 길이 되어버린 지난 주말과 오늘까지의 일이 현실이라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숨이 간당간당 붙어있던 여린 몸도, 죽기 직전에 마지막 눈짓도, 화장하고 나서 뼈만 남은 몸도 모두 분명 보았는데도 이모가 세상에 없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의사의 눈빛은 체념이었는지, 절망에서 오는 깊은 냉소였는지 모를 만큼 읽어내기 힘든 표정이었다. 사망선고를 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을 건넸을 때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침착함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아왔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오열과 한탄에 대응해야 했을지 가늠할 길은 없을 테지만.  마음이 계속 서걱거리는 까닭에는, 이모를 조금 더 편하게 보내주지 못했던 상황과 살아있을 때 이모의 사랑만큼 보답해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다. 집에서 조용히 쉬게 해 달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던, 이모는 결국 병원에서 더 고통스럽게 생을 마쳤다.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면서, 안락사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다. 모두가 짐을 나눠가지게 되는 선택적인 죽음, 그러나 환자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있는 항이 되어야 하는 죽음에 대해서.


어떤 모진 상황에서도 꿋꿋하고 긍정적이던 사람이었던 이모는, 장례식장에서 일생의 오지랖을 많은 사람들의 눈물로 되돌려 받았다. 비단, 자식들 그리고 그토록 아끼던 조카, 형제들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좋은걸 먹이려 했고, 친절하려 했고, 짐 지우려 하지 않았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남은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항상 이모가 뭘 같이 하자고 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연락도 잘 하지 않았던 게 많이 아프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우리 삼 남매를 어여삐 여기던 이모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모가 뭘 잘 먹었는지, 어떤 걸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받기에 바빴던 마음이 죄스럽다.


 장례를 치르는데 이렇게 복잡한 절차와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는지 몰랐고, 슬픔과는 별도로 부딪혀야 하는 현실에 크게 놀랐다. 언젠가 우리 부모님도, 주변의 누군가도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올 텐데 돈 없으면 고인도 편하게 못 보내줄 것 같은 현실이 씁쓸했다. 오늘 화장터에서 세 시간 사이에 본 고인만 해도 열명이 넘는데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걸까? 장례식장에서 나오던 엄청난 일회용품 쓰레기들과 수의부터 관까지 쉴 새 없이 들어가던 비용에 장례문화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겠다는 거시적인 생각까지 미쳤다.


 차차 받아들여야 할 테지만, 이모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대로 이모에 대한 미안함으로, 고마움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느닷없이 보고 싶다고 등산 가자고 하던, 큰 조카 사랑해라고 문자 보내주던, 그리고 명절 때마다 와서 산으로 들로 놀러 가자고 조카들을 보채던 이모는, 여기 없다.


이모가 떠나고 그 이듬해부터 나는 11월마다 유서를 쓴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이 남았지만, 세상일이란 혹시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가는 마음들을 소소하게나마 기록하고 싶어서 이다. 어쩌면, 죽은 자가 산자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두고 온 마음과 마음이 투영된 말 뿐일지도 모른다. 이모가 내게 남겨준 예쁜 말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올해도 유서를 남기기 위해 한 해를 돌아본다.


201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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