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답게 살고 싶다.
종이 위로 획을 그었을 뿐인데, 목덜미가 검게 그을린다.
너는 여기에 없는데 목소리가 들린다.
전부 그만둘까 했지만, 그만둘 것이 없었다.
하루를 비워둔 적이 없는데 온통 공백뿐인 건
어떤 병인지... O 선생님을 다시 찾아야 할 때인가 싶다.
시간은 여전히 말이 없어 죽이기 편했고
하루는 여전히 숨이 없어 죽기 편했다.
구멍 난 지갑에 구멍 하나 더 뚫던 오후
어머니가 짠한 눈으로 나를 보시며 말하셨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그만둘 것이 없어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곤란해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달렸다.
10월, 푸르던 잎이 마르고 바래져 부서지던 계절
그 옆에 누워 나도 부서지기를 바랐던 날.
3년 전 떠난 네가 저 위에서 보인다.
그때처럼 순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는 나를 떠날 때, 이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이제, 그만하자."
사라진 것들은 결국 무언가로 덮어진다.
펜을 손에서 놓으면 결국 다시 뭘 잡게 될 것이다.
뭐라도 잡게 될 것이다.
그게 차가운 펜일지
그게 무거운 줄일지
모를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