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되고 싶다.
매미의 울음이 낯설지 않았던 날. 오늘은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큰소리를 친 지 벌써 한 해가 거품처럼 사라졌고, 보글보글 남은 해마저 사라져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달 전 응모한 공모전에 연락이 없어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심장부터 아팠다. 그렇게 받은 전화는 심장을 걱정해 주는 보험회사 전화였다.
얼마 전 아버지와 단둘이 한 저녁 식사에서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뭐든 다다아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인 줄 아세요?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저는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그때 아버지의 얼굴에선 짙은 그림자와 동시에 찬란한 빛이 보였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버지는 낯선 외부인이었다. 잦은 출장과 늦은 퇴근이 일상이셨던 아버지는 항상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를 보며 한 번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자식이 셋이나 되는 그는 지금 나보다 어린 나이에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당시에 그는 ‘현대 자동차’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가정은 꽤 유복한 편이었다.
그는 잘나가는 세일즈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보안’ 업체를 강남에서 시작했다.
지금 그의 가족은 강남에서 1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안산’이란 도시에 산다. 그러니까, 그의 사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가 잘나가는 세일즈맨일 당시 집에 자식이 한 명이었지만, 쌀이 부족해진 집에 자식은 셋이었다.
그건 불행이었을까?
그가 처음 안산으로 와 살던 곳은 10평 남짓한 조그마한 빌라였다. 10평 남짓한 그 작은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몇 없는 가구에도 붉은 딱지가 붙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업을 이어가려 했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불행은 연속성을 갖는다. 그의 사업은 그 뒤로도 쭉 실패했고, 지친 그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한계였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먹구름을 떠올리시는 듯 어딘가 아버지의 얼굴에는 물이 맺혀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무너짐을 견디고 겪어야 했을까. 쓴웃음을 머금으시며 말하셨다.
“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갔어”
그날 그 팔각정에서 마지막을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도 덧붙이셨다. 도저히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 그것도 펑펑 우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듣는 순간에도 듣고 난 후에도 괴로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가족들이 생각이 나서.."
아버지는 끝말을 잊지 못하시고 숨을 뱉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넥타이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붉게 물든 딱지가 떼지고 살이 올라오려면 ‘회복’이 필요했고 아버지는 옷장에 있던 넥타이를 모두 모아 버린 후 작업복으로 가득 채우셨다. 그 뒤로 아버지는 펜을 놓으시고 페인트 통과 붓을 드셨다.
밧줄 하나에 몸을 묶은 채 건물에 매달려 가족을 위해 버텼다. 365일 중 300일은 그렇게 사셨다. 나머지 65일 중 절반은 일거리를 찾으러 다니셨고 나머지 절반은 쓰러진 채 주무셨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소주 한 잔을 비우시며 이렇게 말하셨다.
“그래, 너는 내 아들이니까, 뭐든 다아아아 할 수 있어.”
매미의 울음소리가 낯설지 않은 날이다. 마침, 비가 온다. 우산을 쓰지 않고 맞기로 했다. 방금 헤어진 친구가 너는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비가 안경에 물방울을 그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숨을 뱉고, 생각했다.
‘난, 우리 아버지 아들이니까.’
“그래, 난 우리 아빠 아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