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타다, 전부 타버린 날.
푸른 잎들이 점점 바래지기 시작한다. 하나 둘 찬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잎들을 보다 보면 괜히 옆구리가 시리다. 가을을 타나보다. 가을에는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정작 내가 가을에 읽은 건 외로움 한 글자뿐이다.
작년 이맘때쯤 만났던 사람이 있다. 우연이듯 운명이듯 필연인 듯 스치듯 만나 지나간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의 짧은 기억은 2000년대 초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가끔 그녀를 떠올리면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을 곱씹었다. 때로는 즐거워서 때로는 아쉬워서.
그런 그녀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보고 싶어"
라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씁쓸했다. 여전히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은 소중한 필름통으로 마음 한 구석에서 잘 보관해두고 있었지만,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내 감정의 솔직한 편이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 다른 말은 최대한 돌려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지만 감정만은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모르겠어"
그녀는 담담했다. 그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번만 만나자고 말했다. 때론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건 바로 이런 때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난 게 하나도 없다. 굳이 굳이 따지려 해도 평범할 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해 그녀를 만나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나도 외로웠고 나도 결국 그런 사람이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감정만큼은 돌려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스스로가 부끄럽고 창피하고 역겹더라도 난 내 감정을 숨기고 그 사람 앞에 서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전부 괜찮다고 말했고, 그녀는 전부 상관없다고 말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겠지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빈자리가 생기면 그때 자기에게 오라고 말했다.
그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아름다움을 넘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난, 기다리지 말라고 말했다. 어차피 빈자리가 생긴다 해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울다가 웃다가 울었다.
그날 이후로 한 달 반 정도가 지났다. 여전히 난 혼자다. 하지만 이제 빈자리가 생겨나는 듯하다. 가을을 타서 그런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른 곳에 있다. 너는 내가 사는 세상에서 조금 어긋난 곳에서 살고, 나는 네가 사는 세상에서 조금 어긋난 곳에서 산다.
너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다. 그날에는 손톱자국을 온몸에 새겨야 했다.
네 앞에서 울지 못해 돌아가는 길에 쉬지 않고 울었다. 그래 난 내 감정을 네 앞에서 숨겼다. 하지만 그게 여태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