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셨다. 함께 혜화역 쪽으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미리 알아둔 식당에서 뜨끈한 솥밥을 먹고,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어머니는 푸르른 나무 아래서 자주 멈췄고, 사진을 찍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옆에서 어머니가 다시 발걸음을 옮길 때까지 기다렸다. 저만치 앞으로 걸어가는 애인은, 아버지에게 ‘엄마도 진희랑 똑같네’라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감탄했다. 이름 모를 큰 나무에, 나무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맑은 하늘에. 나보다 자주 걸음을 멈추는 어른이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평소 애인과 내가 좋아하던 소품 숍을 구경하러 갔다. 방문할 때마다 새로이 아름다운 것들이 나를 유혹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도자기 잔 하나가 눈에 띄었다. 뭐든 조금씩 따라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 내게 딱인 아담한 크기에 동그랗고 귀여운 손잡이, 회색과 푸른색 사이의 오묘한 색에 점묘화 같은 무늬가 있는 도자기 머그잔. 나는 어머니와 걸음을 맞추며 숍 곳곳을 구경했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둘러보시더니 갑자기 뭘 하나 골라보라고 얘기하셨다.
“진희 이거 하나 사. 이걸로 할까? 아니면 저거? 이런 날 또 없어~~ 얼른 하나 골라봐.”
‘엄마, 나는 뭐 없어?’라며 요리를 좋아하는 애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튀김 냄비를 하나 골랐다.
나는 ‘이걸로 같이 할게요.’라고 그 튀김 냄비를 가리켰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에이, 이건 살림살이잖아. 다르지. 그거 말고 진희 맘에 드는 거로~!’ 하셨다. 생각지 못한 어머니의 제안에 조금 아득해졌다. 이렇게 예쁘고 비싼 것들이 많은 숍에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보라니! 사실 늘 마음에 드는 건 많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사기엔 부담스러운 가격대라 딱 하나를 고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충분히 행복한 기분을 느꼈어도 됐는데 나는 왜 그렇게 당황했을까. ‘그동안 뭘 아름답다고 생각했더라..’ 숍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머릿속은 하얬다. 그러다 처음 숍에 들어왔을 때 눈에 띄었던 잔 앞에서 조금을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옆으로 오시더니 ‘어, 그래 이거 예쁘다. 이걸로 할래?’라고 물으셨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같다'라고 쓴 이유는 아마도 아직 당황 중이라 기억이 희미해서다) 어머니는 ‘이거 하나만? 세트로 사야지~’라며 두 개를 집으셨고 오묘한 색과 질감의 잔 두 개는 사각거리는 유산지에 쌓여 각자의 포장 상자에 들어앉았다. 숍을 나오면서는 ‘와아, 이렇게나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이 가게를 나온 적이 있었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함께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걷는 내내 마음이 일렁였다. 오로지 나만의 기호를 묻고 선물해주려 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아주 작고 저렴한 것 하나를 골라 적당히 끝낼 수도 있었는데(?) 진짜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는 죄송함 같은 기분으로. 뒤늦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현실감과 기쁨 같은 것도 섞였다. 마음에 이제 딱 들어온 장난감이 있었는데 떼를 쓰기도 전에 그걸 쉽게 얻어버린 당황스러운 아이가 된 것 같았지.
다음으로 간 장소는 혜화역 근처에 새로 생긴 책방 겸 카페였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차와 커피, 케이크 두 조각을 시켰다. ‘아까 그 가게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더라~’하시며 아버지는 신혼 시절에 샀던 다기 얘기를 꺼내셨다.
“우리도 미술을 하니까 (부모님은 두 분 다 미술 선생님이시다) 꼭 예쁜 것들이 눈에 들어와. 그래서 그때 우리가 300만 원짜리 다기를 샀잖냐.”
“으익, 300만 원?” 애인이 놀라 물었다.
“이게 다기 두 개가 마음에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가 더 눈에 들어오는 거야. 가격표를 보니 하나는~ 30만 원, 마음이 더 가던 하나는~ 300만 원. 근데 사람 마음이, 좋은 걸 보고 나니까 30만 원짜리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거 있지. 없는 돈에 우리는 또 그걸 할부로 긁어버렸지 뭐야.” 어머니가 얘기했다.
“당시 300만 원이었으면 진짜 큰돈이지. 그니까 거기 사람들도 놀래가지고 우리랑 같이 사진도 찍고, 나가려고 하니까 양옆으로 인사하며 쫙 서블더만. 허허허. 그거 아직도 집에 있다, 진희야.” 아버지가 얘기했다.
“그래도 평생 쓸 수 있으니까. 당시엔 할부 값 갚는다고 고생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지~” 어머니의 맞장구.
‘이 정도면 괜찮지’보다는 ‘그래도 맘에 든다 이걸로 하자! 평생 쓸 테니까~’라는 결론을 자주 맺는 나와 애인의 대화가 떠올라 웃었다. 다기 얘기를 듣고 나니, 내 손안에 주어진 잔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 속수무책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른들과 내내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잔은 코팅이 되어 있지 않아 색이 진한 음료를 오래 담아두면 착색이 될 수 있어요. 잔을 계산할 때 숍 직원분이 하셨던 말이다. 그래서 꺼내는 순간부터 다시 찬장에 넣을 때까지의 매 순간마다 조심스레 잔을 대한다. 30년 후에도 이 단단한 기쁨을 손에 쥘 수 있길 기대하면서. 무얼 담아 마시는 것도 좋지만 사실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그래서 나는 잠들기 전 머리맡에 빈 잔을 두고 자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