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람을 흉내 내는 고양이

불량품을 위한 사용 설명서

by 조작가

얼마나 많이 아가미를 뻐금거려야, 저 신호등의 신호가 몇 번쯤 바뀌어야, 내 폐에 얼마나 많은 담배 연기가 축적되어야, 졸린 눈을 얼마나 깜빡여야,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정신은 은화처럼 맑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부수어지기 직전의 것이다. 바닥을 향해 낙화하는 얼음 결정처럼 혹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운 모습을 유지하는 높은 조형물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만 같은 아주 연약한 것들. 시간이 지나면 연약한 것들은 모두 땅을 향해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럼 그들은 이제껏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들을 토해내며 아무런 형태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겠지. 빛은 시간의 부산물의 쫓아 사람들에게 이미 부서져버리고만 연약한 것들의 광경을 보여줄 것이고 그들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부서지기 직전의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이미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현재 내가 그녀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억하는 것은 내가 뼈대만을 남겨둔 채 철저히 또 처절하게 부수어지는 그녀를 발견해서일까? 아니면 그녀와의 충돌로 부서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내가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그녀가 올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까? 그녀가 오지 않을 사실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어떤 색의 정답도 토하지 못하는 무채색의 질문들로 머릿속이 자욱하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환자를 이송하는 앰뷸런스가 눈에 들어오고 역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은 시간에 따라 모습을 바꿔가며 내가 가진 그녀와의 추억의 형태로 나의 눈에 잔상을 남긴다. 저 잔상의 마지막에 그녀의 현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내게 온 순간 그녀는 나의 아가미가 되었고, 그녀의 존재로 인해 나는 홀로 숨을 쉬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부재한 지금 나는 잘린 아가미로 인해 호흡이 간절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총 두 번의 의식이 날아간다. 한 번의 의식이 날아간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또 한 번의 의식이 날아간 순간 난 그녀에 대한 간절함을 느낀다.

사람이 가진 고독이라는 감정은 시간이라는 변수를 가지는 한 비선형함수와 같다. 그러니 함수를 그래프를 통해 나타낸다면 그 모습은 마치 사인함수와 코사인 함수처럼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정점을 향해 계속해서 그 값이 증가하다가 정점을 찍은 후부터는 최저점을 향해 끝없이 추락하는 그런 그래프. 그리고 그래프는 같은 주기를 가지고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영겁의 시간 동안 높은 비탈길로 인해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옮겨야 하는 형벌을 받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라는 인물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저주 같은 것이다. 그 덕에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며 고독의 시간을 몇 번이고 직면을 할 수밖에 없고, 최종에 가서는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가장 고독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경우 ‘고독’이라는 y축을 가진 함수의 주기가 타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았다. 즉 보통의 사람은(적어도 내가 만나보았던) 개월이라는 시간을 단위로 주기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녀의 외로움의 주기는 분단위로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타인과 비슷한 일생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타인의 수 십배 아니 수 백배가 되는 외로움을 직면해야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잘 알지 못했다. 이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형태가 너무나도 다양해서 제 때에 자신의 감정을 포착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아무리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많이 경험한다 하더라도 외로움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외로움이 사람을 찾아왔을 때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오직 ‘낯 섬’이라는 감정뿐이다. 어느 날과 변함없는 같은 일상임에도 주위의 사람과 사물들이 낯설게만 느껴질 때, 사람은 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이 낯설게만 느껴지고 지겹기만 했던 일상들이 왜 낯선 경험이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지칭할 수 없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나는 다만 그 이유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정적인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갖추게 해 줄 것이라고 추측을 해 볼 뿐이다.


현재 이미 지나쳐버린 경로 속에서 과거를 회상 중인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라는 그녀의 질문은 그녀와 함께 있었던 경로를 찾아낼 수 있는 소중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정말 그녀는 그런 식의 질문을 많이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라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그녀가 일본에서 온 터라 한국말이 서툰 것쯤으로 이해했지만 그녀가 그런 질문을 건네는 것은 결코 그녀가 한국말이 서툴렀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의 그런 질문의 일종의 검수 작업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혹은 자신이 이해한 바와 상대의 의도가 정말로 같은지. 그리고 이 검수 작업에서 상대방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차이가 있다면 혹은 상대가 호감을 사기 위해 말을 꾸며 말한 것이라면 그녀는 금방이고 상대방의 말속에 숨겨진 ‘불량품’을 찾아내버리고는 보안 경보라도 울린 것처럼 그녀는 곧장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녀의 이 검수작업은 꽤나 까다로운 편이다. 웬만큼 화술이 능한 사람이라도 그녀의 질문 세례 앞에서는 결국 자신의 본심을 들어낼 수밖에 없다.

휴대폰을 만드는 공장을 예로 들어 컨테이너 벨트를 통해 이미 조립되어 있는 휴대폰이 자신의 앞에 놓이고 검수작업을 맡은 직원은 이미 만들어진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인 여부만 따진 뒤 다시 휴대폰을 컨테이너 벨트 위에 올려두면 되지만, 그녀의 경우 이미 조립해둔 휴대폰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고집스럽게 속에 있는 불량의 원인을 찾아내고야 만다. 공장 주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까다로운 직원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해체전문가이지만 조립은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상대방의 문장 속의 의미들을 하나하나 해체시켜 놓고 상대방의 말속에 가식이 전혀 섞여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그녀는 그 문장을 재조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분해된 문장을 컨테이너 벨트 위에다 올려두는 덕분에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불량품을 확인할 수 있어도, 자신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직원은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공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라는 말 다음으로 두 번째로 그녀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였다. 말을 나누는 도중에도 그녀는 몇 번이고 길을 잃어버리고 마니깐. 따라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에 가식적인 말 혹은 그냥 그저 그렇게 내뱉는 말이 조금도 없는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먼저 검수를 해야 했다.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가식이나 거짓이 없는지.



오늘 집을 청소하다 공책에서 발견한 글이다. 아이패드를 샀던 것이 재작년이었고, 이 전엔 공책에 수기로 글을 직접 썼으니 아마 이 글을 그보다도 이전에 썼던 것일 테다. 그녀의 이름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그녀를 만났던 날 난 시계를 잃어버렸고, 새벽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17000원이라는 택시비를 지불했다는 것뿐이다.

그녀를 만났던 시간은 일주일 채 밖에 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더라도 그녀와 있었던 자잘한 사건들은 기억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기억이라는 것도 참 신기하다.

기억은 기록과 다르다. 기록은 기록을 하는 이의 의지에 따라 기록되는 순서를 정할 수 있지만 기억이란 기억하는 이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 기억은 기억하는 자에게 강렬했던 경험들을 우선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이름이 내게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아니 그 보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그녀의 본명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상대에게 가장 먼저 상대의 이름을 물어보지만, 사실 이름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상대를 명명할 단어를 찾기 위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고, 사회적 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름이란 그저 다른 이가 나를 두고 명명한 것일 뿐이다. 내가 할머니댁에서 분양해 온 고양이 원두가 이 전에는 하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것처럼 다른 이가 나를 부르기 위해 필요한 이름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그녀의 경우도 나에게 그렇게 명명되기를 바랐을 뿐일 거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정말 고양이를 닮았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의 행동습성을 닮아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현재 기억이 나는 대로 그녀의 외양을 떠올려 본다면 그녀의 외모는 고양이의 모습보다는 오리의 모습을 더 닮아있었다. 내가 그녀를 두고 고양이와 닮았다고 한 것은 그녀가 상황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말으로 하는 하나의 게임과도 같다. 그리고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듯 관계라는 이름의 게임에도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바로 등가교환의 규칙. 한 사람이 A라는 말을 건네면, 상대는 A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 B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라는 게임과는 무관한 감정이 끼어드는 바람에 사람은 규칙을 위반하면서 까지 더 큰 가치의 말을 건네기 시작하고, 때문에 균형이 깨어져 둘 중 한 사람은 상실감이라는 페널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뿐이다. 악기는 소리에 민감할수록 그 값어치가 비싸지지만, 사람은 타인의 소리에 민감할수록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모두가 규칙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면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고 세상에 있는 모든 갈등은 사라지고 말 테지만, 그러기엔 세상엔 사람을 흉내 내는 고양이들이 너무 많다.


관계의 개념을 확장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따져보자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에 있어 게임의 규칙을 제정하는 쪽이 될 것이다. 규칙에 따라 동물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면 동물은 때에 따라 우유, 가죽, 고기 등 인간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해 준다. 즉 일정한 환경만 조성된다면 인간은 동물의 번식을 포함해 심지어 그들의 죽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고양이가 될 것이다. 고양이만큼은 인간이 만들어낸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 준 대가로 그들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체모와 배설물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양이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고양이가 어쩌면 인간보다 더 뛰어난 동물일지 모른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스스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인간조차 그들이 내놓는 신호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들은 자신이 신호를 주는 것만으로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해 자신들이 원하는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으니깐. 인간은 반대로 그들에게 그 어떠한 요구도 요청할 수 없다. 고양이는 인간이 만든 게임 속 한 장뿐인 조커 카드인 셈이다.

고양이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이들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등가교환도 아니고. 그들에겐 사람이 베푼 친절에 보답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지금 자신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집사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집에 난 조그마한 틈을 비집고 곧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도 충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니까.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또 더 나은 대접을 해주는 집사를 찾아갈 뿐. 결국 자신이 고양이의 주인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고양이를 찾아 집을 떠나 나서고 결국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고양이가 돌아오게 하는 법은 고양이가 다시 집을 찾을 때까지 고양이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다. 만약 자신이 고양이에게 충분한 애정을 쏟았다는 확신만 있다면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 불면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