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도 했다, 정착.
나는 한 달에 한번 헤어 커트를 하러 미용실에 간다.
같은 동네에 산지 십 년도 넘었지만
같은 미용실을 일 년 이상 꾸준히 다닌 적이 없는 것 같다.
회원권은 당연히 안 끊고
여러 개의 미용실을 번갈아가며 방문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눈에 초점이 없게 힘을 풀고
"아하하하하하하..." 얼버무린다.
미용실 노마드를 자처하는 데에는
나름 사연이 있다.
평소에 커트를 하며 대화를 하다가
미용실 쌤의 질문이
내가 견딜 수 없게 부담스러워지는 임계점에 다다르면
나는 "그 질문은 조금 불편해요"라는 말 대신
조용히 다음부터 안 간다.
말 돌리기 스킬을 아직 연마하지 못한 나는
"학교 다녀요?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 같은 질문을 받으면
"네, 회사 다니거나 대학원 가겠죠...?"라는 추상적인 대답을 한 후
집 가는 길에 새로운 미용실을 검색한다.
그밖에 내가 힘들어하는 질문은
"왜 이번 휴가 때 여행 안 갔어요?"
"왜 파마랑 염색은 안 해요?"
"무슨 일 해요?"
등이 있다.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질문들이지만
내가 저 질문을 답하기 위해서는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주기 위해 솔직하게 말 못 하거나
TMI를 쏟아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것 같아 불편하다.
나는 스몰토크와 인연이 없는 성격이다.
미용실 쌤은 죄가 없다.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손님들을 위해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이지만,
나는 "그 질문은 조금 불편해요"라고 말하면
무언가 기본적인 대화도 거부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아직 도전해보지 못했다.
그냥 눈웃음을 짓고 넘어가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내가 질문을 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두 번 물어보는 쌤도 있어서 내향적인 나는 당황했다.
다행히 요즘은 나의 성격을 단번에 파악한 미용실 쌤을 만났다.
이 쌤은 요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빌리자면
"알잘딱깔센"의 표본이다.
대화를 하더라도 내가 부탁한 헤어 스타일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날씨,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등 보편적인 주제를 택해주어서 항상 안심이 된다.
실력도 좋다.
앞머리는 "눈썹 조금 걸치지만 너무 짧지 않고 길지도 않게 해 주세요"하면 완벽하게 잘라주시고
뒷머리도 "어깨는 넘어가는 길이지만 어깨에 닿아 뻗치는 것은 싫어서 그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짧게 잘라주세요. 그리고 숱은 많이 치면 휑해 보여서 자연스럽게 머리가 너무 무겁지 않을 정도만 잘라주세요"하면
내가 기대한 것보다 언제나 더 예쁘게 잘라주신다.
그리고 회원권 끊는 것에 대해 부담을 안 주시는 것도
마음의 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요소 중 하나다.
사람들은 다 생각이 비슷한지,
예약하려고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 쌤이 가장 예약시간이 꽉 차 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질문이 부담스러워서 예전 미용실을 떠났다는 것은 핑계고,
그 질문을 대답하고 싶을 만큼
이전 쌤과 성격이 맞지도 않고 스타일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이별의 더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미용실 쌤이
어떠한 질문을 해도
어떻게든 대처 방법을 찾아
오래오래 머리 하러 갈 것 같다.
나랑 잘 맞는 미용실 쌤 만나는 것도 인연이고 축복이다.
마음에 쏙 드는 이 분을 만나는 데 이십이 년 걸렸으니,
운명의 친구나 반려견을 만나는 일도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천천히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거짓말같이 만나는 날이 올 것 같다.
대체 불가능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가!
-앞머리 커트하고 집에 돌아오며
빠삐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