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의 바다

대양을 유영하던 대구 한 마리, 겨울이면 늘 아비로 부활했다

by 이봄


족제비싸리 굵은 줄기 가지런히 엮어 울타리 삼고 품 넓게 앉았던 유년의 초가는 고만고만한 애들의 재잘거림으로 늘 시끄러웠다. 천지사방 뛰놀던 몸짓으로 가득해서 늘 번잡했다지만 맑은 시냇물 졸졸졸 흐르듯 귀가 즐거웠다. 봄날 움트는 울타리에 족제비싸리 새순을 꺾어 투명한 수액으로 손톱을 치장하던 어린 누이는 반짝이는 손톱을 보며 입이 귀에 걸렸고, 울타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코발트블루 푸른 약병에 눈을 빼앗긴 나는 한동안 그 푸른 물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을 하늘을 닮았다 생각했고, 짙푸른 바다도 닮았다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 짭조름한 파도가 밀려왔고, 어느 때에는 떼 지어 갈매기가 날아오르기도 했지.


나무 울타리에 부서지던 그 푸른 파도는 아비의 오래된 속병이 안겨준 파도였다. 바다를 닮은 위장약의 파란병은 햇살 고운 날 갈매기 몇 마리 하늘에 날렸고, 날것들이 만들어내는 바다의 비릿함을 풍기곤 했다. 그 바다가 좋았고, 그 하늘이 좋았다. 파란 빈병이 늘어날수록 아비는 병색이 깊어지고, 빈병이 늘어날수록 집안의 쌀가마는 줄어 시름이 깊었는데 나는 다만 그 파랑이 좋아서 울밑에 쪼그려 앉아 바다를 그렸고, 끝없는 창공을 동경했다. 그저,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가 좋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갈매기의 날렵한 활강이 좋았다.



아비의 외출은 좀처럼 쉽지가 않았는데 어느날 장마당이 서던 날 신사용 자전거를 끌고 장에 가셨던 아비의 손에 어른 팔뚝보다 크고 굵은 생선 한 마리 새끼줄에 꿰어 들려져 있었지. 대구라고 했다. 난 그렇게 크고 굵은 생선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배는 불뚝하고, 등에는 고등어의 그것처럼 짙고 멋드러진 무늬가 보기 좋았다. 상상에서 뛰놀던 날것이 아닌 눈앞에 당당하던 대양을 유영했을 대구란 놈을 그래서 한참이나 바라봤었다.

"얘야. 바다는 이렇단다. 바다는 너무도 크고 광활해서 쉬이 그 속내를 짐작하기도 어렵거니와 상상하기도 힘들단다" 얘기라도 하듯 불룩했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손질할 때 대구는 바다를 토해냈다.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오징어 한 마리와 꽁치 두 마리. 짐작할 수 없었던 바다였다.


몇 해가 흐르고 더는 울타리를 따라 빈병이 늘지 않던 날 바다는 더이상 파도가 일지 않았다.

"아버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대문에서의 짧은 대화가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뭍혔을지 모를 일이다. 멀어지는 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아비는 그날 하늘을 날아올라 바람이 되었다. 하교 길, 고갯마루에 올라 바라보던 집 마당엔 하얀 포장이 드리워졌고, 점점이 박힌 사람들은 눈물이었다. 아비는 바람이 되었고, 어쩌면 마당을 덮어버린 흰 포장을 날개삼아 너울너울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비의 파란 약병에서 파도치던 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고, 망망대해 거침없이 유영하던 단단한 대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속병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야윈 몸뚱이 시원하게 벗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었다 해도 좋겠지.



아비 가버린 지금. 그 겨울의 바다를 품은 대구탕과 어느 봄날의 파란 약병에서 일렁이던 바다가 가슴에서 시리다. 바다에서도 나는 어쩌면 눈 앞의 바다가 아닌 가슴에서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하고 자맥질 하는지도 모르겠다. 잊히지 않는 푸른 약병과 바다를 품은 대구 한 마리. 땅거미 지는 산마루 갈피갈피를 오늘도 날렵하게 넘나드는데 가버린 얼굴은 희미하여 아득하고, 다만 가슴에선 오늘도 아비의 푸른 바다가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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