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지펴 마음을 태우다

제법 두툼이 쌓인 것들을...

by 이봄


주섬주섬 흩어지고 쌓인 것들

거두어다 불을 지폈다.

많은 날들이 흘렀으니 쌓인 종이도

제법 두툼하다.

버리지 마라. 부탁하는 친구도 있고

더러는 이거 좋구나 얘기하며

가져도 간다.

그러고도 남은 말들이 쌓여 수다를 떤다.

어떤 녀석은 종일 욕을 해대고

또 다른 녀석 아양을 떨며 사랑을 구하지.

"에이, 제기랄! 지랄을 하네!"

"어쭈, 염병.... 주접이 만발을 하네!"

경기도 포천 어드메쯤 산다는 이 뭐의

빼다 박은 말투다.

한쪽 구석에 얌전히 구겨진 녀석은 또

얼마나 아양을 떠는지 눈꼴이 시다.

"그러지 마시라, 나 얼마나

그댈 사랑하는지 너는 모른다오"

"꽃이 곱다고 한들 어찌 너만 할까?"

얼굴까지 발그레 붉히며

무한반복 사랑을 소원한다.


적막강산 고요한 골방은 그래서

만 날 천 날이 고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장을 들여놓은 것처럼 번잡했고

시끄러웠다.

"가지 마오. 미안하고 또 미안하네.

내 앞으로 잘 할 터이니 가지 마시라!"

무릎이라도 털썩 꿇어 비굴을 떠는 놈은

어찌 없다 할까 싶기도 하여

낯이 뜨거웠다.

묵은 말들을 재워야 했다.

포대기로 둘러업고 자장자장 자장가라도

부르면서 더는 시끄럽지 않게

재워야 했다.


아궁이 가득 녀석들을 모셔두고 불을 지폈다.

가볍고 유쾌하게 불꽃이 일고

발갛게 타오르다 문득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흰 연기로 흩어지며 불꽃이 됐다.

사간이 고였다가 불이 되었다.

때로는 욕지거리 험악한 말들이 그랬고,

읍소 하던 힘없는 말들이 그렇게 불꽃이 되었다.

검붉은 불꽃은 사납게 으르렁 거리던

말들이 타는 것일 터이고,

새초롬 발갛게 타오르던 불꽃은

"어여쁜 그대 가지 마오!"

애타던 말들이었음이 분명할 터였다.

종이 한 장 타는 모양새도

각양각색 달라서 바라보던 마음에

무지개 하나 곱게 피었다.


햇살 고운 날에 한가로운 누렁소

언덕에 누워 오드득 오드득 반추로 여유롭고,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은 나는

타닥타닥 일렁이는 불꽃 바라보다가

거나하게 취한 날이며

외롭다 구차하던 날 갈피갈피 펼쳐 가면서

얼굴도 살짝 붉혀 본다.


타는 것이야 종이 몇 장이라지만

일렁이는 불꽃은 수다스러운 말들이다.

투닥이고 토닥이며 재잘거리던

날들이고 시간이다.

백지장 너른 품에 쏟아냈던 말들이

뜨거운 숨결로 소성하며 저 먼 하늘에

먼지가 되는 거다.


맺히지 않고 부유하지 않아 오히려 자유로운

그래서 어느 날엔가 비가 되고

바람이 되어 다시금 내게로 올 말들이다.

검댕이 하나 남김도 없이 마지막 티끌까지

붉고 뜨겁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가장 정갈한 재 한 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늘 언저리에 올라 순수로 머물

말이고 소망이기도 하다.

떠올라라! 하여, 가장 순수한 어느 날에

내게로 돌아와 다시 불꽃이 되어라.

타닥이다가 불꽃이 되어도 좋은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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