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

도랑 하나쯤 사이에 두고

by 이봄


도랑 하나쯤 사이에 두고 그가 있다.

마치 방바닥 가운데에 손가락으로 선 하나

긋고서 그는 이렇게 말했지.

"너, 이 선 넘어오면 안 돼. 알았지!"

마지못해 나는 대답을 했어

"알았어, 넘지 않을게"


좁아터진 책상 둘로 나누고 눈을 흘기던 순이와

많은 얘기 밤을 새워 속삭이던 영숙이도

사이에 뭔가 하나 세워두고서 거기에 있었다.

때로는 넘지 말아야 할 담장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둘을 잇는 가교가 되기도 했다.

고치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써내려 가는 말들은

문자로 굳어진 낱말이 아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였고

속삭임이었다.

자문자답 때로 독백이어도 좋았고,

창호지 뚫어 궁금해하던 사람들 모두 들어도

그만인 방백이기도 했다.

콩닥 이는 가슴 억누르며 꼴깍 침을 삼키는 말.

말들은 늘 선 저편과 나를 이어주는

담장이고 편지 한 통이었다.


담장만큼이나 키가 자란 오늘이야

잘 자란 뽕나무는 바다도 된다는 데

편지는 사라져 공과금 통지서로

우체부들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치고,

낮은 담장은 허물어져서 말들 맺히는

스크린이 되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다.

그와 나 선 하나 사이에 두고 안부를 묻지.

"잘 잤니? 날이 쌀쌀해"

그러면 저쪽 담장 너머에서 말이 날아들었어.

띵동 알림음은 경쾌만 했고.

"응, 넌? 주말이 보름이래?"

그러면서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어린 날의 그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누렇게 몰려가던 벼 이삭과 가을볕에 갇혀

더듬이 매만지던 메뚜기를 소환하면

어느새 입은 벙글어지고 이내 까르르

자지러지던 소녀가 남고 까까머리 소년이 남았다.

"나 그러고 놀았다. 너는?"

"나도 그랬어."


정월 대보름이면

깡통 하나 주워다가 구멍을 숭숭 뚫고서는

철사나 군인 통신선 꼬아서 줄을 매달아 횃불 깡통

만들었다. 앞 산 산등성이에 올라 소나무 죽은

그루터기 찾아서 송진 가득 맺힌 관솔을 모았다.

관솔 잘게 쪼개 깡통에 넣고 불을 붙이면

마치 기름을 부은 것처럼 활활 어찌나 잘도 타던지,

타는 불의 솔향기는 또 얼마나 좋았나 모른다.


"뭐해? 대답이 없네?"

그가 물었을 때 과거를 뛰놀다가 화들짝

돌아와서 대답을 했다.

"응, 있잖아. 나 방금 깡통에다 불 붙여 신나게 돌리다가 왔다. 하하하"

싱겁기는 넌 어쩜 여전히 애다. 애...

그래, 난 여전히 애다. 그럼 어때.

난 이렇게 살다가 가련다.

얘기를 했다.

사이에 담장 하나쯤 있는 게 꼭 담장으로

갈라놓는 것만은 아니다 싶은 생각을 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한 발 물러나서

나를 보는 것도, 그렇게 너를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아니, 오히려 꽤나 괜찮다.


띵동 벨이 운다

"밥은 먹었어? 난 지금 먹는 중^^"

오늘도 너와 나

스크린 하나 사이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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