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연애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종합 선물세트 같은 봄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산골짜기마다 따스한 햇살이 기웃거리는 날이 왔는가 싶더니만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불청객이 고개를 들었지요. 시리게 푸르던 하늘은 몇 날 며칠을 연이어 희뿌옇게 가라앉아서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어요. 중국에서 날아드는 미세먼지와 자가 충전하는 도시의 미세먼지가 한데 어우러져 도심을 채우고 들을 지나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촌구석도 예외 없이 들어찼음이지요. 아랫녘의 꽃소식은 왕왕 시끄러운데, 꽃피고 새 운다는 소식만으로 귀가 즐거웠으면 좋겠는데, 세상도 시끄럽고 덩달아 찾아든 황사바람이 시야를 가려 더욱 답답하다 할까요. 요 며칠 그런 날들이 이어졌어요.
그러다 오늘, 마당을 서성이다가 올려다본 하늘은 못처럼 만에 푸르고 맑았습니다. 파란 하늘과 점점이 떠가는 구름이 마냥 좋아서 살짝 상기된 얼굴로 한참을 보았지요. 부는 바람은 또 어찌나 맑고 향기롭던지 모릅니다. 철쭉나무 사이 아늑한 터에 자리를 잡고 해바라기 삼매경에 빠진 오월이는 늘어지는 하품으로 봄을 만끽하고, 돌 틈을 비집고 돋기 시작한 돌나물과 벌써 손가락만큼 웃자란 돌미나리들의 푸른 군무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서 사진 몇 장을 찍습니다. 보고 만지는 것들이 다 기적입니다. 듣고 스쳐가는 것들이 진득하게 참아 견딘 것에 대한 선물이구나 싶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예년만 못한 동장군의 위세라지만 철원을 접한 경기도 마지막 동네인 여기는 여전히 매섭고 사나운 겨울을 맞아야 합니다. 가을이 슬슬 꼬리를 감추고 성난 이빨 무섭게 드러내고는,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달려드는 겨울은 말마따나 삭풍이 불고 눈보라 몰아치는 동토의 계절입니다. 길기는 또 얼마나 긴지 모진 세월을 견뎌야 하는구나 하는 장탄식이 먼저 새어 나옵니다. 그 겨울의 끝에 마주하는 봄이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찬란한 봄날을 어슬렁거렸습니다. 느긋하게 콧노래도 한 자락 뽑아가면서 어느새 등줄기엔 오월이를 닮은 짙고 멋진 호랑이 줄무늬 하나 문신을 새기듯 돋아났을지도 모릅니다.
“천천히 오셔요. 산 넘어 깊은 골짜기에 저고리 골에도 한 소쿠리 쏟아내시고, 신작로 활처럼 휜 검정다리 언저리쯤에도 두어 됫박 부려도 좋아요. 다만, 여기 약사 마을 좁은 터에도 두어 움큼 덜어내시면 그것으로 좋아요”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손님처럼 오시는 봄은 그래서 반가 운가 봅니다. 종합 선물세트 손에 들고 찾으시던 일가친척 같습니다. 봄은 분명 선물입니다. 그것도 형형색색 알록달록 갖은 아양으로 반겨야 하는 선물입니다. 향긋한 껌 두어 통에 바삭바삭 소리도 맛있던 비스킷과 달콤 쌉싸레 황홀경에 빠지게 했던 초콜릿까지, 보도 듣지도 못했던 과자가 한가득 담겨있던 종합 선물세트 같은 선물입니다. 할머님이 상자를 열고 ‘옛다, 너도 하나. 큰애는 크니까 알사탕 하나 더’하시던 그 선물세트 앞에서 얼마나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말똥말똥 시선은 얼마나 과자에 꽂혔는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봄이 그렇습니다.
다시 연애라도 할까요?
선물세트를 뜯어보다가 첫사랑 꽃순이를 생각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밥을 먹다가도 실없이 웃기도 하고, 자려고 누우면 천장 가득 흰 구름 떠가듯 꽃순이의 얼굴이 동동동 떠다녔지요. 만져지지 않을 얼굴임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 봅니다. 그러고는 피식 혼자 웃고 말지요. 풋풋한 소년의 첫사랑만 어디 그럴까요. 흔한 말로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사춘기 소년의 사랑이거나 중년의 사랑이거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이런 말을 저도 모르게 주절거리게 되겠지요.
"네 앞에서는 장미꽃도 어여쁨을 잃고, 하늘의 태양도 그 빛을 잃어 눈부심을 멈추고 말아!"
말도 안 되는 말을 단호함이란 멍석 위에 올려놓고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시키려 입에 게거품을 물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스스로도 동의하지 못할 엉뚱함이 거기에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동의를 얻어야만 내가 정상이겠거니 하는 안도감을 얻으려는 유치한 몸부림일지도 모릅니다. 곁에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그래요. 이미 온통 연분홍빛 하늘이 장막을 드리우고 가슴은 알싸한 꽃향기에 취해 몽롱한데 뭐라 채근을 할까요. 눈에 봬는 게 없는 사람한테 주절주절 입방아를 찧어봐야 입만 아픈데 말입니다. 그저, 정화수 곱게 떠서 손발이 하나 되게 빌고 빌던 어미의 그것처럼 '행복하여라, 행복한 만큼 가슴 찢어지는 아픔도 있으니 부디 아파도 행복하여라' 축원 축수 빌어줌이 그만입니다.
세상 하늘이 눈부시게 파랗거나, 아득하여 노랗거나 때로는 오리무중 막막하여 새까맣거나 하다가도 순간,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로 발갛게 달아오르기도 하는 게 소위 '사랑'이란 녀석의 힘이기도 합니다. 그게 외사랑 홀로 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첫눈에 눈 맞아 마른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듯 뜨겁고 요란한 길일 수도 있겠죠.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훈수는 사절입니다.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을 보태서 저마다 신의 한 수로 훈수를 둔다지만, 돌이켜 보면 그 훈수란 게 얼마나 헛된 수고였는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이란 감정만큼 각자의 개성으로 똘똘 뭉쳐진 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모두가 압니다. 도저히 세상의 잣대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제지도 못할 바퀴벌레 한 쌍이 서로 좋아서 죽고, 행복해서 자지러지는 게 사랑이란 놈입니다.
이해 불가요, 접수 오류인 행복이 사랑이지요. 오직 둘만의 눈 맞음이면 세상을 통째로 준다고 해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일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못할 열병입니다. 죽어도 아깝지 않을 멍청함이 온갖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대체합니다. 그 사랑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외사랑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해서 외롭고 고단한 사랑이라 단언할 이유도 없습니다. 본래 사랑은 주고받는 거래가 아니라서 주어도 주어도 주고 싶을 때, 그래서 마침내 마음에 곳간들 모두 털어 그에게 주고서 동가식서가숙 하여도
"하하하, 너 웃으니 나도 좋아. 정말이야, 있잖아 난 네가 행복하면 그만이야"
하면서 세상 모든 것 가진 사람의 넉넉함으로 입 꼬리 찢어진다는데 뭐라 하겠어요. 번갯불이 휘번쩍 요란을 떨어야만 비로소 사랑하였노라 한다면 감정에 대한 오판이고, 사랑에 대한 모욕일지도 모릅니다.
짐짓 중늙은이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가 종합 선물세트 같은 봄을 맞았습니다. 더없이 좋은 햇살과 꽃도 없는 들녘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인데도 꽃향기 잔뜩 묻어있어 절로 코를 킁킁거립니다. 시간은 뒤섞여 유년의 나를 보게도 되고, 청춘의 나를 만나게도 됩니다. 꽃도 없는데 향기는 아득하고 나뭇잎 하나 움트 지도 않았는데 산천은 어느새 푸릇푸릇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손목 한 번 잡아보고 싶어서 꽃순이 주위를 얼마나 맴돌았는지 모릅니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를 그가 눈앞에 서있습니다. 가슴은 방망이질로 콩닥거리고 잡지 못한 손은 바르르 사시나무가 되었습니다. 들키지 말아야 할 마음이라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심장을 재차 눌러봅니다. 쿵쾅쿵쾅 소리가 요란합니다.
편지 한 장 보내고 싶었습니다. 꾹꾹 눌러쓴 손 편지로 떨리는 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있잖아, 꽃순아. 난 네가 정말 좋아!”
부끄러워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줄 달랑 적어놓고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종합 선물세트 품에 안고서 이웃한 꽃순이에게 달려가는 나를 봅니다. 비라도 내린다면 들꽃 하나 질끈 꺾어 꽂고서
“꽃순아, 꽃순아. 뭐하니? 나랑 놀자!”
달려가고 싶은 오늘입니다.
종합 선물세트 품에 안고서 발그레 얼굴도 붉히며 달려옵니다. 봄이 달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