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 가득 콩나물이 자라듯

#05 검정 고깔이었나 봐

by 이봄

콩나물로 산다는 건...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찾아들고서 지갑은 어디에 있더라? 아, 자동차 열쇠는 또 어디 있지? 번갯불에 콩이라도 볶듯이 넥타이는 대충 개의 목줄처럼 목에 두르고 헐레벌떡 집을 뛰쳐나오는 사내들이 도시의 아침을 열었다. 아침은 고사하고 시원한 물이라도 제대로 마셨는지도 모를 초췌한 모습으로 더러는 자동차를 몰고, 더러는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한 인간 군상 속으로 젖어 들어 스스로 콩나물이 되었다.

누구는 하얗고 투명한 고깔을 머리에 쓰고서 까박까박 졸았다. 또 누구는 까만 고깔을 머리에 썼다. 검정콩으로 키워낸 콩나물은 까만 고깔을 머리에 썼다. 반대로 메주콩으로 키워낸 콩나물은 하얀 고깔을 머리에 썼다. 세태를 반영해서 까만 고깔을 머리에 쓴 콩나물은 더는 구경하기 어려웠다. 일일이 고깔을 벗기고 희고 곧게 뻗은 몸뚱이를 지나 꼬불꼬불 돋아난 뿌리는 댕강 모가지를 잘라내야만 했다. 아주머니들의 수고로움으로 다듬어진 콩나물만이 전골이 되었든 콩나물무침이 되었든 식재료로 쓸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고르고 다듬어도 미처 벗겨내지 못한 그놈의 고깔이 은근슬쩍 콩나물 몸뚱이에 섞여 보이지 않아야만 일하기가 편했다. 하나만 벗겨내지 못해도 ‘아저씨? 나 고깔 그대로 쓰고 있어요!’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검은콩은 천하에 몹쓸 녀석이 되어 찬밥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몸값은 오히려 더 비싸게 부르기 일쑤여서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였다.

키워내는 방식에 따라서 해장국용이나 무침용으로 용도가 달라지는데 용도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해물찜이나 요리의 부재료로 들어가는 콩나물은 몸통이 통통하고 곧게 뻗은 녀석을 사용하는데 일자 콩나물이라 하고, 나물로 무쳐먹는 콩나물은 조금 구불구불한 몸뚱이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름도 곱슬이 콩나물이라 불렀다. 더러는 기능성이 강조된 귀하신 몸이 되기 위해 콩나물에게 금기시되던 햇볕을 강제로 쪼여야만 했다. 누구나 아는 노랗고 앙증맞은 머리에 희고 뽀얀 몸뚱이를 하고 있는 콩나물이 아니었다. 일광욕으로 몸을 태운 콩나물은 초록의 머리를 하고서 잔뿌리도 복슬복슬 뻗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밤새 ‘마셔라, 부어라. 네가 죽나 내가 죽나 끝까지 달리는 거야’ 설레발을 떨던 김 과장이나 이 대리의 썩어 문드러진 속을 달래줄 아스파라긴산이란 낯선 이름의 숙취해소 음료로 재탄생되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윗목 한구석에 함지박을 놓고 가지가 둘로 갈라진 나무를 얹고는 질박하게 생긴 시루를 올려 키워내던 어머니의 콩나물은 생활사 박물관을 두 눈 부릅뜨고 찾아다녀야만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하얀 면 보자기 단단히 둘러싸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물을 줘 키워내던 고소하고 아삭한 콩나물은 그렇게 박제가 되었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대량생산을 해야만 살아남는 시대에 콩나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에서 자라 일란성쌍둥이로 포장되어 어느 대형마트 신선코너에 앉아 호객행위를 한다.

“아주머니, 저 어때요? 저는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에서 최신 설비로 재배된 엘리트 콩나물이랍니다. 물론, 물이야 지하 300미터 천연 암반수만 먹었답니다.”

갖은 아양을 떠는 콩나물 옆에는 사각의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두부 한 모 울긋불긋 포장지 뒤에 숨어 이미 팔려간 동료를 생각했다. 험상궂은 사내 울뚝불뚝 근육을 자랑하며 두부 코너를 둘러보더니

“야야, 이게 맛있겠냐? 그 옆에 놈이 맛있겠냐?”

“형님도 무슨. 두부를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 뭐 이런 의미로 먹는 거죠”

“그래도 이놈아 이왕이면 고소하고 맛있는 게 좋지. 하하하”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 하더니만 두부 팔자도 그랬다. 보글보글 찌개로 끓어 호호 불어가며 웃음꽃 피워내는 식탁에 올랐다면 그나마 두부로써의 한평생 여한이나 없었을 터였다. 차디찬 길바닥에 한입 크게 뜯긴 몰골로 뒹굴어야 하는 팔자는 말 그대로 사나운 팔자였다.

콩나물무침이었으면 했다

곳간에 두었던 종자들을 꺼내 멍석 위에 펼쳤다. 겨우내 썩지는 않았는지 확인도 해야 했고 쭉정이도 골라야 했다. 수확을 할 때면 언제나 종자로 쓸 튼실한 것들을 먼저 고르게 마련이었다. 먹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신중하게 씨를 골랐다. 크고 때깔도 좋아야만 했다. 거기다가 생김새도 동글동글 예쁘거나 납작하고, 동그랗고, 길쭉해야만 했다. 어미에서 어미에게로 이어진 생김과 때깔을 유지해야만 다시 또 그렇게 생긴 녀석이 대를 잇기에 수확하는 것 중 가장 곱고 예쁜 녀석을 골랐다. 넓게 펼쳐놓은 멍석 위에 굶어도 먹을 수 없는 종자들을 널었다.

호박, 옥수수, 수수, 감자, 검정콩, 메주콩, 조, 율무 등등의 것들을 늘어놓고서 자식들 어루만지듯 만져도 보고 나지막이 이름도 불러주었다. 주름 깊은 눈으로 하나하나 둘러보는 시선의 끝에는 사랑도 듬뿍 묻어있었다.

“얘들아, 올해도 작년처럼 병해충 씩씩하게 물리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열매로 여물었으면 좋겠다. 이른 새벽부터 해 걸음 저녁에도 도란도란 얘기하듯 발소리도 들려주고, 때로는 쓰다듬어도 줄게. 알았지!”

사내는 들릴 듯 말 듯 당부의 말을 중얼거리며 눌러쓴 모자를 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윤기 흐르고 총총하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고 성성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사내의 지나온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한때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헐레벌떡 버스를 타고 종종거리던 출근길이 있었고, 철커덩 철커덩 쇳소리 뿜어내며 달려오는 지하철을 눈 빠지게 기다리던 퇴근길도 있었다. 머리에 쓴 고깔로 구별되어 하루하루 마트의 진열장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원하는 고깔을 쓰고 이왕이면 섬섬옥수 아름다운 여인의 손에 들려 된장찌개 속 두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솜씨 좋은 주방 아주머니의 손끝에서 고소하고 아삭한 콩나물무침이 되길 꿈꾸던 그였다. 하얀 고깔의 콩나물이었다고 믿었다. 아스파라긴산으로 중무장한 귀하신 몸은 아니어도 고만고만한 대접을 받는 하얀 고깔의 콩나물쯤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하는 거였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라도 타야만 했다. 좌석에 앉는 행운은 바라지도 않았다. 자리에 앉는다는 건 어쩌다 맞는 요행으로 족했다. 손잡이만이라도 편하게 잡을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

벗어놓은 모자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래서 그랬을까? 씨앗을 어루만지는 사내의 손길은 유독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시집을 보내는 딸아이 손 맞잡고 좀처럼 놓지 못하는 아비의 손길과도 같았다.

“얘야, 잘 살아야 돼. 때로 다투고 싸운다 해도 서로 양보하고 보듬으면서 잘 살아야 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의 손엔 검정 모자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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