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낮술이나 한잔 할까?
때때로 기우제를 지내듯
잠이 채 달아나지도 않은 시간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고서 일기예보를 확인 해. 그러면 늘 화면 가득 아리따운 기상캐스터가 나와서 상냥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오늘은 대체적으로 맑은 날이 되겠습니다.’ 하고 그날 하루의 날씨를 설명을 하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오늘은 비 소식이 없구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일 나갈 준비를 하는 거야.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 없는 게 농촌의 일이고, 몸뚱이로 하는 일이어서 어쩔 수가 없어. 어쩌다 벽에 걸린 달력을 확인하는 건 그저 오늘이 며칠 일까 하는 정도의 궁금함일 뿐. 휴일이 언제인지가 궁금한 게 아니야. 황금연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닷새나 된다느니 샌드위치로 낀 월요일만 월차를 내면 이레가 된다느니 하는 얘기는 먼 나라 얘기야.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바람 끝에 축축한 빗방울이 매달렸다 싶으면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거야. 내일은 비나 좀 내렸으면 좋겠다. 아니, 이왕 내리는 거 주룩주룩 한 이틀쯤 내렸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담아서 날씨를 확인하는데 화면 가득 노란 해만 동동동 떠다닐 때의 심정이란....
“제기랄, 비라도 내려주면 어디 덧나나. 논밭도 가뭄으로 시들시들 병든 닭 마냥 까부라지고 있는데...”
일을 해야 포도청이란 목구멍에 죽이라도 넣어줄 터이니 당연 일을 해야만 하겠지만 어디 사람이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슬슬 꾀를 부리게 마련이지. 5일 근무다 어쩐다 하는 이야기야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나 해당되는 말이고, 날이 좋으면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야 하늘만 올려 보면서 언제쯤이나 비가 내릴까? 기우제라도 지내는 심정으로 기원의 주문을 외는 거야.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있고, 간절하면 하늘도 돕는다는 말도 있지. 그렇지만 책에도 구구절절 나오는 말이고, 말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달고 사는 말도 실상은 현실에서 마주칠 일이 그다지 많지도 않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도 하고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저주처럼 퍼붓는다 해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햇살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그 열기를 더할 뿐이야. ‘너희들이 아무리 떠들어 봐라. 내가 어디 눈이나 하나 끔쩍하나 봐라’ 하는 거지. 뭐 용빼는 재주가 없으니 구시렁구시렁 입술만 댓 발 빼어 물고는 삽질이나 하는 거지 뭐.
친구야, 오늘 뭐해?
예보에도 없던 비가 새벽부터 내리던 날 아침부터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야, 오늘 뭐하니? 거기도 지금 비 내리지?”
“그러게. 여기도 장난이 아닌데. 주룩주룩 퍼붓는다 야”
“그렇지. 그럼 오늘 땡땡이겠네?”
“응, 그렇지 뭐. 야, 잘됐지. 그렇지 않아도 쉬고 싶었는데...”
정말이었어. 몇 날 며칠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다 보면 체력이 떨어졌음을 스스로 느낄 만큼 방전이 되기도 해. 그럴 땐 징검다리 띄엄띄엄 개울을 건너듯 쉬어줘야 탈 없이 일상을 보내는 게 맞는 거야. 쇳덩이로 만든 기계에도 윤활유를 주입하고 마디마디마다 윤활제를 발라주는데 가시덤불 하나에도 상처를 입는 연약한 육신이야 말해 뭣하겠어.
“야, 지금 내려갈 테니까 집에서 기다려. 비 오시는 날 낮술이나 한잔 하자!”
“그래 알았어. 기다리마. 운전 조심해서 와라. 하하하”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고 흙먼지 이는 바람이 불어 가면 앞산 참나무들이 떼를 지어 잎을 하얗게 뒤집는 거야. 부는 바람엔 잔뜩 흙냄새가 묻어있고. 그럼 먼 산 뾰족한 봉우리를 올려다봐. 아니나 다를까 뾰족한 봉우리가 구름에 갇혀 희뿌옇게 보이고, 이내 산자락을 따라서 희뿌연 바람이 불어오지. 소나기야.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 뿌옇게 몰려오는 바람을 보면 하던 일을 접고서 달음박질을 쳐야만 했어. 서둘러 뛰지 않으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하지 못할 게 뻔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냅다 달리는 거야. 개울을 건너고 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를 가로질러서 마당쯤 다다르면 ‘후드득 후두둑’ 소리도 요란하게 소낙비가 쏟아졌어. 정말이지 운동회 날 달리기 경주를 하듯 사람도 뛰고 소나기도 뛰는 거야.
“오늘은 내가 기필코 이기고야 말겠어. 먼저 번에도 내가 거의 다 이겼었는데...”
“에라, 어디 네 생각대로 되나 봐라. 넌 나한테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주거니 받거니 대거리를 하면서 뛰고 또 뛰다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당에 들어서서 숨을 헐떡였었어. 소나기란 녀석은 늘 느닷없이 달려들어 당황스러웠지만 달궈진 열기를 몰아내고, 일손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의 망중한을 선물하는 녀석이었어.
백아와 종자기는 아니어도
“어, 왔구나. 들어와 길은 막히지 않던?”
“비가 와서 좀 그랬지. 길은 휑하니 좋던데. 금방 왔잖아”
“그래, 고생했다. 너 오니 좋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고 우기며 사는 둘이라서 살가운 안부 라야 ‘왔구나?’하면, ‘그래, 왔네!’가 다라지만 어디 말로 물어야만 안부라더냐. 왔으면 되었고, 보았으면 되었지. 곁에서 누군가 보았다면 싱거운 녀석들 다 보겠네, 하겠다만 어쩌랴. 내가 거문고를 타는 백아가 아니어서 찾아든 녀석도 종자기의 달달한 말은 없었어. 이왕지사 술잔을 나누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들로 밤을 지새울 터였으면 거문고라도 배웠으면 참 좋겠다 싶었지만, 거문고가 없어도 그의 선율에 솟아나고 흐르던 산과 강이 없어도 그만이었지. 밤 같은 낮이 있었고, 음악처럼 듣기 좋은 빗소리가 마당에서 요란했어. 갑자기 소환된 초록의 방탄 모자를 눌러쓴 소주 일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도 쫑긋 세워 ‘도란도란 두런두런’ 싱거운 놈들의 대화를 엿들어 웃고 있었지.
창밖엔 비가 보기 좋게 내리고 방에는 후닥닥 몰려가던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어. 길고 지루한 장맛비가 아니었어. 눅눅하고 끈적해서 여기저기 곰팡이 피워내는 지루한 장맛비라면 손 사레 거칠게 쫓아낼 터였지만, 애호박 송송 썰어 넣고 지글지글 부쳐내는 호박전에 막걸리 한 사발처럼 달큼한 소나기가 내렸어.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리고, 느닷없이 친구가 찾아들고, 낮술에 취해도 좋을 시간이 소반에 앉았지. 가끔, 아주 가끔 만나게 되는 시간이 그래서 더욱 반갑고 좋을 테지. 주야장천 이어지는 이야기야 어쩌면 귀에 딱지로 앉을 거야.
“뭐해? 제사라도 지내냐? 기분 좋게 한잔 쭉 마셔”
“그래. 그러자. 자, 내리는 비를 위하여....”
소주 일병이 이병을 부르고, 이병은 다시 상병과 병장을 모셔야만 했어. 볼따구니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뭐가 좋은지 되지도 않는 말로 히죽거려도 좋았지.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에 밤 같은 낮이 어둑할 때 꼬부라진 혀로 떠들었지.
“친구야, 너 있어 참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