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밥만 먹고 사니?

#08 가끔 생각을 하게 돼

by 이봄

"인간아, 넌 밥만 먹고 사니?"

분주한 도시를 떠나 한적하다 못해 적막강산인 시골로 내려와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면서도 때때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질문을 하게 돼. 살아 있으니 당연한 질문이겠지. 하루 삼시 세 끼를 꼬박 챙겨 먹는다고 해서 ‘나는 밥으로 살아’ 하고 대답을 하지는 않을 거야. 사람이 살려면 밥을 먹든, 아니면 고기를 먹든, 위장을 채워줘야 에너지를 얻게 되고, 결국 그 힘으로 살게 마련이지만 그런 말이 있잖아.

“에라, 인간아. 밥만 먹고 사니? 밥만 먹고살아?”

앙칼진 마누라의 잔소리에 잔뜩 주눅 들어 방바닥만 긁고 있는 사내는 정말 밥만 먹고살아서 욕을 먹는 거겠지, 밥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올법한 직무유기에 관리 태만 이런 등등의 죄를 지은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랑스러운 아내의 입에서 서릿발 서걱대는 북풍한설이 몰아칠 수밖에 없겠지. 자업자득 직무유기요, 관리 태만이 가져다준 당연한 질책이라고 생각해야 해. 가자미눈을 하고서 식은 밥덩이 툭하고 던져주는 밥상을 받는다면 생각을 해봐야 해. ‘뭔가 문제가 있구나. 그것도 아주 심각하고 곪아 터진 뭔가가 있구나!’하고 고민을 해야만 하는 거야. 마치 세상의 종말이 코앞에 왔다 싶은 심정으로 고민을 해야 해. 고민과 반성도 모자랄 판에 거기다 대고 버럭 화를 낸다면 아, 그 미련하고 참담한 존재라니.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어.

뭐가 다르겠어. 목줄 단단하게 차고서 하루 종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개와 뭐가 다른지 나는 알지를 못해. 다른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으면 귀띔을 해줘. 내가 알지 못하는 심오하고 거창한 그래서 마침내 대세를 거슬러 인류 공영의 새로운 지평을 열 그 이유를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아시아 대륙으로 삶의 근거지를 확장했듯이, 고개 숙인 남자들에겐 분명 신대륙의 발견만큼이나 위대한 일이 되겠지. 그러니까 혼자만 알고 있기엔 그 이유가 너무나 소중한 인류, 그것도 수컷들의 공동자산인 거야.

만일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치고 ‘넌 무엇으로 사니?’하고 물으면 대답하겠지.

“밥을 먹고살아요. 거기에 더해 주인님의 사랑스러운 눈길과 손길이 있으면 더욱 행복하지요”

분명 개도 그렇게 말을 할 거야. 밥을 먹고 산다고 대답을 하겠지만 밥만으로 행복하다 말하지는 않을 게 틀림없어. 말도 못 하는 개도 그래. 주인의 따뜻한 보살핌에 어쩌면 엄지를 치켜세울 거야. 밥만으론 충족되지 않는 무엇이 개에게도 존재한다는 말이야. 사람이라면, 그것도 식은 밥덩이 던져주는 그라면 얘기해봐야 입만 아프지 않겠어. 잡힌 물고기라고 해서 방치해도 된다거나 더 나아가 떡밥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그 주둥이에 재갈을 물려도 할 말이 없어야 이성을 가진 사람의 도리라고 봐. 오히려 더 많은 관심과 양질의 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야. 자유롭게 유영할 권리를 빼앗아놓고 데면데면한다면 말이 안 되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주둥이와 입의 차이점은 알 거라 믿어. 혹여 모를까 싶어 설명을 덧붙인다면 동물의 입은 주둥이라 말을 하고, 보통 사람의 입은 주둥이라 표현하지 않아.


원래 유치한 거야

가끔 늙수그레한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렇게 말을 하곤 해.

“고생한 거야 알죠. 물론 사랑도 해요. 어디 꼭 말로 해야만 아나요. 이심전심 말을 안 해도 알아야 그게 사랑이죠. 안 그래요?”

안 그래요. 알 수가 없어요. 말을 않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물론 대충 그러려니 하는 짐작을 할 뿐. 궁예가 되살아나 관심법을 전수한 것도 아닌데 사람의 마음을 어찌 들여다볼 수가 있겠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을 못 하겠다고 사내는 말을 하고, 잔뜩 홍조 띤 낯빛으로 한쪽에선 평생의 소원이 ‘사랑해 여보!’하는 소릴 듣는 거라고 얼굴을 붉히는 거야.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는데 곁에서 옆구리 찌르는 사람의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한다고 하면 너무 슬픈 일이야. 뭐가 창피하고 부끄러운지. 무엇이 유치하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발가벗고 춤을 춘다 한들 부끄러울 이유가 어디 있겠어. 가장 은밀하고 대담해도 좋을 둘이서 아껴두었다가 죽으면 관 짝에 넣고 가려는지 몰라도 표현에 그리 인색한지 이해할 수가 없어. 물론, 살아온 시대가 지퍼를 채우듯 입을 꾹 다물고 사는 게 미덕이라 포장을 했어도 그래.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 데도....”

흥얼흥얼 콧노래로 즐거울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겠지. ‘어디서 좀 노셨군요?’하는 추임새를 꼭 노래방에서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거야. 음치면 어떻고 박치면 또 어때. 아무리 노래가 엉망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는 그것만으로도 가장 달달한 사랑노래일 거야. 영화에 나오는 그 어떤 로맨틱한 세레나데보다도 더 황홀한 사랑의 고백일 게 분명해. 듣는 사람은 또 어떻겠어.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아니라고 타박을 할까. 아니면 ‘어쩌면 당신은 그렇게 노래를 못해’ 구박하고 면박을 주겠어. 입 꼬리는 이미 귀에 걸릴 듯 치켜 올라가고, 심장은 다듬이질하듯 콩닥거릴 거야. 긴 생머리 나풀거리며 한껏 멋을 부린 청춘의 그녀로 되돌아갈지도 모르겠어. ‘어머머, 너무 멋져요. 자기는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 하는지 몰라...’ 가슴을 파고들며 아양을 떨지도 모르겠어. 아침에 일어나려 알람을 맞추듯 머릿속에 그를 위한 사랑의 말 한 구절 알람처럼 맞춰놓는 거야. 그러고는 아침이면 벨소리로 그를 깨우는 거지.

“잘 잤어? 오늘은 하늘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꼭 당신처럼 예뻐!”

“어머, 당신도 참 주책이야. 아침부터 부끄럽게...”하겠지.

그렇게 아침을 열면 아마도 상다리는 두어 달을 못 버티고 부러지고 말 거야. 일식 삼 찬이야 젊은 군인들한테 던져버려도 좋아. 말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게 꼭 천 냥의 빚을 갚는 것만 있는 건 아닐 거야.


사랑한다는 말은 꿈꾼다는 말이야

가끔 너는 다 늙어서 무슨 놈의 ‘사랑타령을 그렇게 하냐?’ 면박을 받기도 한다만 사랑타령은 멈출 수가 없어. 문지방을 넘을 힘이 있거나 숟가락 들 기운만 있어도 곁눈질을 한다는 남자라서 사랑타령을 하는 것만은 아니야. 내게 사랑은 꿈을 부르는 꽃이기도 해. 향기에 이끌려 벌 나비 날아들 듯 사랑타령을 하는 심장엔 꿈꾸는 내가 있어. 깊은 동면에 빠졌던 꿈 한 자락이 봄날 움트는 새싹처럼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거야. 사랑은 숨길 수도, 막을 수도 없어서 재채기와도 같다고 말을 하잖아. 꿈이란 녀석도 그런 것 같아. 봄볕에 고개를 드는 들꽃처럼 ‘나 당신 사랑해’하는 말 한마디에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말아. 무엇에 기인한 자신감 인지도 모를 당당함이 스며들어서 떡잎을 피우고 가지를 치는 거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내게 사랑은 잠들지 않는 꿈을 꾸게 하는 햇살이야.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노래를 부르듯 그대 사랑하는 난 "꿈꾸는 사람"인 거지.

“있잖아. 나, 너를 사랑하나 봐”

오늘도 붓을 들어 너에게 사랑고백을 해. 끝나지 않을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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