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누구의 발소리에 살을 찌울까...
새벽 어스름엔 늘 논둑을 걸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다. 비록 쭉정이가 나온다 해도 종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게 농사다. 심고 거두는 것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콩을 심어놓고서 팥 타령을 할 수는 없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땅은 허투루 생명을 키우지 않았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새벽 어스름이면 일어나 논둑길을 걸었다. 밤새 논둑이 터지지는 않았는지, 논물은 적당히 들어찼는지, 아니면 고라니며 노루가 들어와 벼 포기를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농부는 이른 아침을 먹었다. 키우는 농작물이 우선이었다. 마른논에는 물꼬를 트여주고, 쥐구멍으로 물이라도 빠질라치면 단박에 틀어막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야만 목구멍에 밥을 떠 넣을 수 있었다. 애지중지 자식을 돌보듯 새벽을 걸었다. 누가 시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흙에 기대어 산다는 건 그런 거였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고이 잠든 농작물을 깨웠다. 시끄럽고 요란하지 않게 자분자분 걷는 걸음은 유쾌하고 맑았다. 흙탕물 몰아가는 장마철의 개울물이 아니다. 졸졸졸 소리도 곱게 어여쁜 임의 귀에 속삭이는 고백의 말이었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얘들아, 이제 일어나야지. 밤새 천둥이 요란하더니 그래도 탈 없어 다행이야”
두런두런 말을 던지면 깊은 잠에 빠졌던 녀석들 일제히 고개를 들어 기지개를 켰다. 주인의 발소리에 귀 기울여 자라는 것들은 그래서 다정한 눈빛에 한 뼘 키를 키웠고, 어루만지는 손길에 두 뼘 품을 넓혔다.
농작물을 살찌운다는 곡우 비가 내리는 밤, 빗소리에 포동포동 덩달아 살이 오른다. 두 발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두 팔은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본다. 아침이 되면 머리는 바삐 해를 좇을 것이다. 단단히 내린 뿌리는 땅의 자양분을 바삐 빨아올리고,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는 무수한 이파리 피워내 품 가득 햇살을 받을 거였다. 붉은 피는 색을 바꿔 초록으로 물들이고서 힘차게 뛰는 심장의 파도를 탄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온몸 구석구석 엽록소가 채워지면 드디어 우주의 기운을 자양분 삼아 뽀드득뽀드득 살이 오를 거였다. 보기 좋게 부푼 등짝과 만삭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기분 좋은 근육의 파열. 쩍쩍 실금이 터지고, 콸콸 쏟아지는 엽록소의 흐름은 혈관을 만나 강을 이뤘다. 대지는 햇살로 충만했다. 땅은 기름지고 햇살은 충분해서 하늘을 이고 선 것들 날마다 한 자씩 키를 키웠고, 품을 넓혔다. 다툴 일 없는 성장이었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린 몸뚱이는 마침내 움을 틔워낸다. 품은 넉넉하게 늘고 키도 한 자쯤은 자랄 터였다.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편 가르지 않고 내리는 곡우의 비가 아닌가. 땅에 기대어 사는 것들 하나같이 키를 키우고 살을 찌우는데 나 하나쯤 더 발을 담근다고 해서 내 것이니 네 것이니 다툴 일은 없었다. 만물을 살찌운다는 곡우 비 소담스레 내리는 날에 앞마당에 나아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비를 맞아도 좋았다.
곡우에 내리는 비, 흠씬 맞아나 볼까?
허리띠 없이 바지를 입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리띠 없이 바지를 입을라치면 엉거주춤 저 먼저 허리가 휜다. 가랑이는 어깨 품만큼이나 벌리고 엉거주춤 움츠려야 겨우 엉덩이 어디쯤에 바지춤이 매달려 버둥거릴 거였다. 평생의 소원이 넉넉하게 살 한 번 찌는 거였다. 결혼을 하면 자연스레 살집이 오른다며 걱정을 말라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결혼을 하고 십 수년이 흘렀음에도 말라비틀어진 몸뚱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다가 12시 땡 하고 자정을 알리면 라면 한 봉지 뜯어 양은냄비에 끓였다. 짜게 먹으면 살이 찐다는 헛소리도 노칠 수 없는 경전이었다. 마침내 말라깽이 세상을 등지고 포동포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할 성서였고 말이었다. 진실한 믿음으로 그렇게 몇 년을 기도하듯 살았으나 내게 허락된 몸뚱이는 여전히 비루먹은 늙은 말이 고작이었다. 개종을 했다. 진실한 마음을 버렸다. 경전을 쓰레기통에 버렸음은 물론이다. 더는 걱정 말라던 뭇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세상은 그래서 공평하다 생각했다. 누구는 살이 쪄서 고민이었고, 누구는 너무 말라서 고민이었다. 쪄도 고민이었고 말라도 고민이니 차라리 공평하다 생각하기로 했다. 학창 시절 완성된 허리둘레는 중년이 되었음에도 청춘의 그것으로 당당했다. 28인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리는 주먹 하나쯤의 자유 통행권을 허락했다. 그러니 허리띠를 바짝 죄어야만 행동이 자유로웠다. 묶지 않으면 자유롭지 못한 아이러니가 평생의 벗으로 남았다.
비를 맞아볼까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해본다. 살이 오르고 찌는 비, 곡우 비라서 그렇다. 투닥투닥 내리는 빗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봄비 맞아 지천으로 움트는 봄나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올랐다. 가시 성성한 두릅이 그랬고, 꼬부랑 머리 하얀 솜털로 감싼 고비가 그랬다. 향기 짙은 취나물이 그랬고, 고사리 손 여린 줄기도 그랬다. 봄나물이며 하다못해 잡초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의 부활과 성장, 낮과 밤이 바쁘고 고왔다. 볕 좋은 낮, 참나무 등걸에 듬성듬성 구멍을 뚫고, 솜처럼 하얗게 균사가 핀 종균을 구멍마다 하나씩 넣었다. 표고버섯 종균이다. 표고버섯 종균을 넣었으니 분명 표고버섯이 돋을 터였다. 설마 하니 표고버섯 심은 데에 느타리버섯이 돋지는 않을 거였다. 타고나길 말라깽이로 태어났으니 말라깽이로 사는 거였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이치였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듯 유전자의 위대함도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너는 마른 몸으로 살라 했다.
“그랬던 거야, 남들은 물만 마셔도 찐다는 살이 내 것은 아니었던 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 좀 마르면 어때? 말라 가벼우니 관절염 걱정도 그만큼 덜 해도 좋을 거고. 비만으로 고생하는 많은 것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새털처럼 가볍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하다가도 쉽사리 놓지 못하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동동 미련으로 떠돌았다.
“밥 좀 많이 먹어라. 사내자식이 그게 뭐냐. 멸치도 너보단 통통 하겠다”
“아이고, 어디 그렇게 가냘파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오늘 강풍이 분다는데 주머니 가득 뭐라도 채워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나도 배불뚝이로 뒤짐 지고 어기적어기적 걸어봤으면 좋겠고, 발밑에 떨어진 동전 따위 아예 찾을 생각도 못해봤으면 좋겠다만 어디 그게 마음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귀 따갑게 평생을 따라다니던 말들이었다. 남 보기에 좋은 오동통한 몸뚱이는 다음 생애에나 기대해야 하는 숙제였다. 그나저나 구멍마다 종균을 넣던 날에 이리도 곱게 곡우 비가 내리시니 가을에 돋을 표고버섯은 분명 우량아 선발대회에 나가도 좋을 만큼 크고 튼실하게 돋을 터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