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 못한 꿈이 바람에 흔들렸다

#12 더는 품지 못하였으므로...

by 이봄

봄날, 고집이 덕지덕지 꽃으로 피었다

짙은 어둠을 뒤로하고 꽃은 피었다. 나팔꽃은 굳이 새벽 어스름에 피어나는 고집을 피웠다. 한낮의 찬란함을 마다하고 달뜨는 밤이 되어서야 남몰래 피어나는 달맞이꽃도 피었다. 긴 겨울이 지나 마침내 봄이 되었을 때 산과 들, 어디여도 마찬가지다. 꽃들이 피어나는 곳엔 어김없이 제 고집에 겨운 녀석들 재잘거려 시끄러웠다. 한 무더기 곱게 핀 진달래는 연분홍 치맛자락을 나풀거려 유혹을 하고, 건너편 작은 언덕엔 벚나무 한그루 함박눈 소담스럽게 피워내 향기롭다 자랑을 했다. 봄은 그랬다. 보들보들 여린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을 때 ‘보시어요, 보시어요!’ 수줍게 손짓하는 꽃순이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꽃순이가 그렇듯 꽃들도 제 고집으로 피고 졌다.

“아무 말 마시어요. 저는 새벽이 좋아요. 제게 한낮의 찬란함이 어떻고 하는 말은 하지 마시어요. 네? 제발 부탁이에요”

“맞아요. 저는 달님이 좋아요. 동산에 두둥실 달님 떠오르면 숨이 멎을 것만 같아요. 심장은 가쁘게 뛰고, 숨은 멎어요. 그러니 제게 낮에 피라 마세요. 제 이름은 달맞이꽃이거든요"

커다란 눈 동그랗게 뜨고서 또랑또랑 대답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은 고집이기도 했고,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땅이 얼어붙고 바람이 대각 거리며 불어 가는 겨울은 사납고 길었다. 움츠리고 엎드려야만 견딜 수 있는 고난이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숨죽여가며 가장 낮은 모습으로 엎드려 견뎌야만 했다. 겨울의 끝에는 분명 봄이 있다 했는데 정말 봄이란 녀석이 있기나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있다는 것 없었을 때의 절망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믿지 못할 말들이 춤을 추었다. 이미 풀이 꺾여 치쉬고 내리 쉬는 한숨이 겨울을 덮었을 때 새벽, 동터오는 어스름은 꿈이었다. 견디고 이겨내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침내 봄이 되었을 때, 모질고 질긴 것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듯 기억에서 지웠다. 새로운 것들로만 줄을 세워 피어난 봄이었으므로 묵은 기억이나 사나운 추억은 더는 필요치 않았다. 봄날, 고집이 덕지덕지 꽃으로 피었다.

굴삭기의 굉음이 어지러웠다. 시멘트 담장은 맥없이 무너졌다. 견고함을 더하려 얽어놓은 철근의 단단함도 소용이 없었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굴삭기의 험악한 몸짓에 풀썩 무너진 담장은 생의 마지막에 비명 같은 먼지를 피워냈다. 뽀얗게 일어난 먼지는 분명 비명이었다. 한때는 꿈을 꾸면서 쌓았을 담장이었다. 쇠파이프로 뼈대를 삼고 철근을 엮어 세웠다. 고운 모래에 시멘트를 섞고 찰 지게 개어 분칠을 하듯 미장을 했다.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담장 위에는 높다랗게 지붕이 얹어졌다. 지붕은 하늘을 닮은 파란 페인트로 칠을 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축사였다. 젊은 농부는 축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인생의 달콤함을 꿈꾸었을 터였다. 늙은 부모와 꽃처럼 어여쁜 각시, 오순도순 살아가는 꿈이었다.

동네 몇 남지 않은 젊은이였다. 두엄냄새 맡아가며 흙투성이로 살고 싶은 젊은이는 가뭄에 콩 나듯 한둘이 고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도회지가 손짓을 하는데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 끓는 청춘이 아닌가. 꿈 하나에 목숨을 던질 청춘 이어서 오히려 맘껏 꿈을 펼쳐볼 도시의 삶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꿈을 좇을 나이여서 그렇다. 하나 둘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을 때 고집하나 단단하게 부여잡고서 시골에 남은 그가 새롭게 꿈을 꾸었다. 채 피우지 못한 꿈 한 자락을 접어 축사를 허물었다. 무너진 담장의 뽀얀 먼지 뒤에 매달린 꿈이 있어 다행이었다. 하늘을 닮은 파란 지붕은 또 다른 하늘빛으로 빛날 터였다. 고집 하나로 핀 봄날은 그래서 재잘재잘 시끄럽듯이 축사 무너진 뒷마당엔 굴삭기의 굉음이 그렇게 시끄러웠다.


빈껍데기 무게 없는 알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때 이른 꽃을 만나면 반가움이 앞선다. 성미 급한 나를 만난 듯한 동질감이 느껴서 그럴 수도 있다. 겨우내 무채색 정지화면만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울긋불긋 살아 꿈틀거리는 날것의 생동감을 만났을 때, 당연 바라보는 내 심장도 뛰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이내 서리라도 내리면 어쩌누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미처 피어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꿈은 눈물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에 품었던 꿈 내려놓게 되는 순간의 먹먹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꺼이꺼이 소리 내어 통곡하고야 마는 그래서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위태롭게 올라서서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을 담담함이 거기에 있기도 했다.

이름도 알지 못한다.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 둥지를 틀고 짝을 찾아 사랑을 나눴다. 가슴팍에 돋은 깃털 일일이 뽑아 둥지를 단장했다. 자신이 가진 가장 보드랍고 따뜻한 깃털이었다. 몇 날 며칠 온갖 정성을 다해 털을 고르고 마른 풀잎이며 줄기를 모아 둥지를 꾸몄을 거였다. 철 모르는 서리가 내리고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을 둥지여만 했다. 고단한 날개 쉬어가자고 둥지를 짓는 새는 없다. 비가 내리면 날개를 접고서 겨드랑이에 머리를 파묻으면 그만이었다. 내리는 비는 깃털을 따라 흘러내렸다. 차가운 바람은 깃털을 파고들지 못했기에 높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졸아도 그만이었지만, 새끼를 위한 둥지는 따뜻하고 튼튼해야 했다. 정성을 다했다, 라는 말로는 부족한 사랑이었다. 부리는 갈라지고 깃털은 찢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모성이 거기에 있었다.


부화하지 못한 산새 알 둘, 바람에 흔들렸다. 껍데기만 남아 무게조차 느끼지 못할 공허가 머물렀다. 뛰지 않는 심장은 가벼워서 바람이 되었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어미의 꿈은 어느 골짜기를 떠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는 품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주체하지 못할 사랑으로 둥지는 따뜻하고 포근했을 터였다, 족제비며 고양이의 매서운 엄니에도 물러섬이 쉽지 않았을 어미는 훌쩍 둥지를 버리고 떠났다. 버려진 꿈이었다. 무엇이 꿈조차 지키지 못하고 허둥지둥 달아나게 했을까? 궁금했다. 안타까웠다. 아니다. 조그만 몸뚱이 어느 하늘을 날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갈대 무성한 개울가를 지나 버드나무 키가 큰 둔덕을 넘어 날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날개 짓에 빈껍데기 무게 없는 알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꿈 하나 가슴에 품고 산다. 삶의 많은 것 사라지고 난 뒤에도 심장 팔딱이듯 꺼지지 않는 꿈을 꾼다. 허황한 꿈일지도 모른다. 남은 것 없으니 마지막 손아귀에 움켜쥐고서 차마 놓지 못하는, 꿈이라는 이름의 미련일지도 모른다. 네모난 지우개 손에 쥐고서 쓱쓱 싹싹 지워야 할,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바람 불면 꺼질 듯 출렁이는 꿈이란 놈 품에 품고 사는 나날이어서 부화하지 못한 산새 알 바라보면서 먹먹함을 더하게 되는 걸까? 거친 사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장 나무 깊이 새긴 이름을 지웠다. 붉은 인주가 지워졌다. 깊게 파인 이름이 지워지며 사포 위엔 진달래며 벚꽃 무리 지어 피어나듯 봄이 만개했다. 향기 없이 꽃이 피고 졌다. 도장 나무 단단한 면에 이름을 새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좀처럼 놓지 못하는 꿈이 있어서다. 쓱쓱 싹싹 지우개똥으로 죽어간 이름이 다시 날카로운 칼끝에서 오늘도 되살아난다.

“철없다 핀잔을 마라. 나야 이렇게 살아도 좋다네. 숱하게 많은 사람 중 한 명쯤은 이렇게 사는 놈도 있어야 세상이 재미있지. 안 그래? 이름 없는 들꽃도 제 고집에 겨워 꽃을 피운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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