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뜨거웠으니 사랑이었다
기대어 살아가는 것들은 숲이 되었다
이름 없는 산 깊은 골짜기에 오디가 까맣게 여물었다. 손바닥 만 한 뽕잎엔 하얀 누에 몇 마리 사각사각 뽕잎을 갉아먹었다. 바람마저 잠든 고요한 골짜기 가득 쏴아 소낙비 몰아가는 소리가 들린다면 소리의 근원은 분명 하나다. 손가락만큼이나 크게 자란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을 때 산골짜기엔 소낙비가 몰아갔다. 사각사각 쏴아 불어 가는 소리에 나무들은 일제히 나뭇잎을 뒤집었다. 볼이 터지게 뽕잎을 갉아먹은 누에는 머지않아 하얀 실 주둥이에서 뱉어내며 희고 단단한 고치를 만들었다. 허옇게 뒤집힌 나뭇잎은 추임새였다.
“그래, 잘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 이지러진 달이 다시 차오르기 전에 넌 하얀 누에고치 단단하게 만들고야 말 거야. 우린 너를 믿어. 힘내 알았지”
날짐승도, 들짐승도, 커다란 숲에 기대어 살았다.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도 그랬다. 참나무는 소나무와 이웃해서 살았고, 싸리나무는 국수나무 누런 꽃잎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칡덩굴을 왼쪽으로 돌아 나무를 타고 올랐고, 등나무 질긴 줄기는 오른쪽으로 돌아 나무를 올랐다. 갈등이다. 풀지 못하는 꼬임을 갈등이라 말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가슴에 서슬 퍼런 비수를 꽂는 것만은 아니었다. 얽히고설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때 한 몸뚱이로 사라질 뿐이었다. 기대어 살았으니 손잡고 가는 거였다. 다람쥐 한 마리와 주둥이 삐죽한 너구리도 한 마리 뽕나무 그늘로 찾아들었다. 까맣게 익은 오디가 땅바닥에 가득 쏟아졌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킁킁 땅바닥에 코를 박고서 산길을 내려오던 멧돼지도 덩달아 침을 흘렸다. 식탐으로 눈을 부라리며 난리법석을 쳐대는 녀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누어 배를 채웠다. 박새도 서넛 날아와 가지 끝에 앉아 주린 배를 채우고 총총히 날아갔다.
기대어 살아가는 숲은 그래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나무는 열매를 맺어 온갖 짐승을 키웠다. 다람쥐는 가을 노루꼬리 만 한 햇살을 바삐 살았다. 긴 겨울을 대비하려면 시간이 모자랐다. 볼따구니 가득 도토리며 알밤을 연신 물어 나르기 바빴다. 동면을 위해 판 긴 땅굴엔 도토리가 쌓이고 알밤이 들어찼다. 그러고도 아쉬웠던지 물고 가던 도토리며 알밤들 여기저기 땅을 파고 묻기를 반복했다. 기대어 살찌웠으니 밥값을 하는 거였다. 묻는 다람쥐야 겨울나기를 위한 저장이라고 우길 터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녀석의 기억력은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 이듬해 산허리 여기저기서 움이 텄다. 참나무가 떡잎을 틔우고 머루 덩굴은 멀찍이 떨어진 양지 뜰에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는 사는 터를 옮길 수 없었기에 꽃으로 열매로 날짐승을 불렀고, 들짐승을 꾀었다. 건강하게 대를 잇기 위한 본능이었고, 진화의 몸부림이었다. 세상 거저는 없다고 봄에는 달콤한 꿀과 꽃가루로 유혹했다. 비지땀 쏟는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로 수고스러움을 다독였고, 가을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씨앗을 내어주며 응원하고 힘을 불어넣었다. 씨앗은 어미나무의 품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보내져야만 했다. 자가수분을 막기 위한 떨어짐을 짐승들은 충실히 수행했다. 도토리로 배를 채운 멧돼지는 산마루를 넘고 골짜기를 지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똥을 쌌다. 똥에서부터 숲은 시작되었고 꽃으로 자랐다. 봄부터 가을까지 숲은 살아있는 것들을 살찌웠다. 산마루에 뉘엿뉘엿 석양이 걸리고 촘촘히 꽂힌 솔잎 사이로 바람이 불어서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왔을 때 볕 좋은 숲 바닥에 떡잎 하나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린 연두 비바람에 초록을 더하고, 세월을 더해 가지를 뻗고. 이파리 풍성히 내어 나무라는 이름을 달았다. 잔잔한 수면에 톡 하고 떨어진 홀씨 하나 조그맣게 동심원을 그리듯 안에서 밖으로 하나 둘 셋... 그렇게 원을 그리기를 열두 해. 겨울날의 눈보라에 한여름의 태풍까지 온몸으로 받아내며 뽕나무로 자랐다. 하도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는 뽕나무 씨앗은 이었는데 봄이 오면 꽃 피우고, 햇살을 자양분 삼아 열매도 맺었다. 박새 한 마리 오디로 배를 채우고서 여기 볕 좋은 곳에다 똥을 쌌나 보다. 주변엔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 없었다. 기대어 살았을 녀석의 보은이었다.
여보, 오늘은 된장찌개나 끓여야겠요
어미나무가 그랬듯 뽕나무 작은 씨앗 어느새 품 넓은 나무로 자라 산짐승, 날짐승 거두어 품었다. 이름 없는 산자락에 기대어 당당하게 뽕나무로 뿌리내렸다. 씨앗 하나 움을 틔우고 안에서 밖으로 세월을 더해가며 자랐다. 숲의 일원으로 기대어 산다지만 어찌 봄날의 달콤함만이 세월의 전부였을까. 무심히 불어 가는 바람도 상처가 되었고, 소담스레 쌓이는 눈에도 가지가 부러졌다. 어느 해에는 너무 많은 누에를 품었다가 뽕잎 하나 제대로 남지 않아 이른 가을을 홀로 맞아야 했다. 민망한 낯으로 한 계절을 살아야 했는데 그때에도 새는 날아들어 지친 날개 쉬었다가 날아갔다.
“어머, 무슨 일이에요? 아직 이파리 노랗게 단풍으로 물들어야 있어야 하는데...”
“아, 그게 누에들이 얼마나 먹성이 좋던지 이렇게 됐네요. 그래도 뭐 고치가 얼마나 단단하고 희던지 정말 예쁘더라고요. ‘미안해요. 우리가 너무 심했죠’ 괘면 적어하길래 괜찮다고 그랬어요. 내년에 다시 풍성하게 이파리 틔우면 됐죠 뭐. 호호호”
별일 아니라는 듯 뽕나무가 산새에게 말했다. 누에들이 얼굴을 붉히며 미안해요 말을 할 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더 민망하고 미안했다.
“얘들아, 정만 난 괜찮아. 내년에도 크고 윤기 나는 이파리 무성하게 키울 테니 꼭 다시 날아와 꼬물꼬물 누에를 낳아주렴. 그럼 되는 거야. 알았지”
“정말, 그래도 될까요? 너무 극성을 떨어서 어찌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어요”
도란도란 둘이 나누는 이야기는 정다워서 듣기 좋았다. 듣는 나야 듣기에 좋았다지만 상처였고 흉터였음이 분명하다. 숱한 얘기가 켜켜이 세월로 쌓이더니 언제부터인가 동그랗던 나이테 이지러지고 찌그러들더니 지금의 몸뚱이로 한 세월을 살았다.
이야기는 영원하지 못했다. 영원한 생명이 어디 있을까만 느닷없는 이별은 쓰리고 아렸다. 세월의 무게 오롯이 견디던 몸뚱이는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톱질 몇 번으로 잘렸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작별의 말도 남기지 못하고 허리를 잘렸다. 아랫마을 사는 사람이었다. 느타리버섯을 키울 요량이었다고 했다. 숲으로 살았던 뽕나무 한그루 덜렁 그루터기만 남기고서 떠났다. 주고도 또 내어주던 나무였다. 기대어 살았던 많은 것들은 또 그렇게 품어줄 나무를 찾아 걸음을 서두를 터였고, 커다란 그늘 사라져 볕이 좋은 땅에는 다시 누군가 날아와 똥을 쌀 터였다. 그러면 씨앗은 움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자라겠지. 잘린 나무의 이야기는 멈췄다지만 숲은 다른 얼굴로 자랐다. 하얀 몸뚱이가 멋스러운 자작나무 뿌리를 내릴 수도 있었고, 조그만 바람에도 놀라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야 말 사시나무가 움틀지도 모른다. 이름이 무엇이면 어떻고 생김이 어떠면 또 어떨까. 기대어 사는 녀석들은 어제처럼 푸르고 날렵하다. 내어주고도 부족한 것 없나 두리번거리던 나무는 사랑을 품고 살았다. ‘너는 이래서 좋고 너는 저래서 싫구나!’ 하면서 편 가르지 않았으니 상처마다, 옹이마다 이야기가 쌓였고 사랑이 남았다. 아랫마을 어느 집 한편에서 너는 또 느타리버섯 먹음직스럽게 키워내며 세월을 붙들고 있겠지.
“느타리버섯은 역시 뽕나무 느타리가 최고야. 향기 좀 맡아봐 좋지”
“그러게요. 오늘은 버섯 듬뿍 넣고 된장찌개나 끓여야겠어요. 여보!”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고 마주한 사람들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뽕나무가 들려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