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거기 앉아 거라

#15 기다림이 짙어 초록으로 물든다 해도

by 이봄

차마 위로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그리웠던가? 온몸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너는 없는 듯 있는 듯 거기에 있었다. 하늘은 맑아 시퍼렇고 숲은 깊고 짙어서 온통 푸르렀다. 국수나무 이파리도, 물푸레나무 푸른 등줄기도 다 그렇게 초록으로 짙어갈 때 너는 은연중에 초록이 되었다. 곁에 있으니 닮아야 했는지 모른다. 번잡하고 잡다한 게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길에서 빤히 보일 거리에 있었지만 오고 가면서 너를 본 적이 없었다. 있었는가를 모르는 너는 나무를 닮았고 숲을 닮았다. 온몸 푸른 잉크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푸르게 위장을 하고서 숨소리 죽여 가며 유령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가? 묻고 싶었지만 차만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너의 침묵은 무거웠다. 산 그림자가 짙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금니 아프도록 꽉 깨물고서 들썩이는 어깨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뭣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겨우 참아내던 울음 순간으로 쏟아낼 너였다. 위로할 처지가 아니어서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너 어깨 들썩이면서 우는 날이면 어쩌면 나도 그렇게 서럽도록 울지도 몰랐다. 가슴 한 편에 푸른 멍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너처럼 속으로 깨물며 삼키는 눈물이 서너 됫박은 될지도 모른다.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차마 너에게 다가가 앉을 수가 없었다.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다. 지치고 고단한 몸뚱이 토닥이다 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위로가 될까? 생각하다가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너의 고요와 침묵의 무거움을 나는 흔들 수 없었다. 가뜩이나 깊을 상념인데 되지도 않는 위로로 너의 침묵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멍으로 짙어진 너의 몸뚱이에 어찌 눈물 한 방울 더 보탤 수 있다던가? 없는 듯 스미는 초록이 너였지만 지켜보는 나이기도 했다. 가던 길 멈춰 쉽사리 떠나지 못할 때에는 고만한 설움 같이 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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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주는 곳마다 지천으로 피었으면 해

부러진 나뭇가지 치우고 썩은 등걸을 걷어내어 길을 만들어주랴? 오솔길 패인 곳에 흙을 돋우고 자갈이라도 채워 길을 뚫으랴? 길은 곧아지고 가릴 것 없어 훤히 너 보인다 하면 차갑게 돌아선 마음 되돌릴 수는 있을는지 장담할 수가 없다. 굳이 원한다면 들어주지 못할 소원이 아니다. 잠깐의 수고로움이 너의 끝도 없는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는 우거진 수풀을 자르고, 깎여나간 그 길에 흙을 돋워 주련다. 돌릴 수 있는 마음이라면 그렇게 하마. 돌아올 발길이라면 길이라도 뚫어주마. 다만, 걷어내고 닦은 그 길에서 어쩌면 도 다른 아픔이 기다릴까 두려웠다. 너 기다리는 그 누가 밤길이 어둡다던가? 다만, 어두워서 못 오는 길이라면 소나무 죽은 그루터기 관솔이라도 캐어다가 활활 횃불을 밝혀주마. 불은 밝아서 십 리 멀리서라도 흔들리듯 너 보겠다만 올까 말까는 장담할 수가 없다.

너나 나나 없는 듯이 스몄다가 지나는 바람이나 동무 삼고,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애인도 하자꾸나. 묻지도 마라. 그저 마음에 담아 바람은 친구 삼고 산새는 애인 삼으면 그만이다. 이왕이면 어쩌다 오가는 것들 가슴에 담지 말고, 흔하고 흔해서 눈길 가는 곳 마다 지천으로 피었기를 바라야지. 올려 뜨고 내려뜨고 어디를 바라봐야 그대 오실는지 고민도 필요 없을 그라면 더욱 좋겠다. 기다림은 애당초 있지도 않는 말이라고 귀엣말로 속삭일 그라서 애지중지 사랑이 깊어질 터였다. 깊은 그리움은 계절이 가기 전에 꽃불로 타오를 거였다. 까치발로 서성인다고 그가 올까? 그리움이 옅어질까? 서성이는 걸음마다 마음만 번잡하다. 그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렇게 스몄다가 계절이 꽃불로 타거들랑 서럽게 울어도 좋을 것을....

“너는 거기에 그렇게 앉아있어라. 나는 다만 곁에서 졸다 깨다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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