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만 저 홀로 졸고야 마는
이십여 분이 멀다 하고 버스는 오갔다. 뽀얗게 흙먼지라도 일으키며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쉼 없이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 뒤에도 더 이상 도로에는 먼지가 일지 않았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숨을 쉬기도, 그렇다고 멍하니 바라보기에도 힘들었으면 했다. 외면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길은 이어져 너에게로 닿아있을 터였다. 너에게로 이어진 길을 거슬러 오르면 내게서 시작된 길이었다. 길은 언제나 이어져 있어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더는 너를 찾을 수 없을 때 길은 이미 난도 질 당한 종이 짝에 지나지 않았다. 구겨지고 찢긴 종이였다. 잘리고 뜯겨 건널 수 없는 길이 긴 그림자로 누웠다. 뽀얗게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던 버스가 거기에 있었고, 바리바리 보따리 이고 진 어미가 있었다. 산나물이며 검정콩 한 됫박 버스에 실려 자취방 궁색한 부엌을 차지할 터였다. 스포츠머리 짧게 자른 이등병은 설레는 가슴으로 피엑스로 달려갔다. 얼마나 기다리던 만남이었을까? 꿈에서도 몇 번이고 돌아서던 그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왔다. 길은 넘실거리는 강물처럼 온갖 이야기들을 품고 달렸다. 내릴 곳을 지나쳐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장롱 깊숙이 숨겨놓은 쌈지 돈 훔쳐 들고 가출을 꿈꾸는 녀석은 짐짓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지난여름 태양은 정수리 위에서 기세를 떨쳤다. 삼복더위의 위세는 대단해서 뙤약볕을 이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섬처럼 이어진 나무 그늘을 찾아 사람들은 깨금발을 뛰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걸음처럼 그늘에서 그늘로 숨어 다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날, 신작로 변에 자리한 단풍나무 짙은 그림자에 의자 하나 놓았다. 바람은 제법 시원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쯤은 너끈히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너는 단풍나무 그늘에 앉아 재잘재잘 수다가 즐겁다더니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계절에 떠났다. 꾸역꾸역 사람들을 쏟아내던 버스는 그만큼의 사람을 싣고서 멀어졌다. 서둘러 일을 보고 해 걸음에 돌아올 그가 있었고,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사람도 있었다. 길은 이어져 있었고 버스는 오늘도 바삐 오갔다.
체온이 채 사라지기 전에 낙엽 하나 의자에 떨어졌다. 가을이 기대어 졸았다. 한동안 의자는 나뭇잎의 차지였다. 진눈깨비 내리던 날 바람이 몹시도 불더니만 낙엽마저 날아가 의자는 텅 비었다. 온기 사라진 의자와 무심히 내리는 눈만 가득했다.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길도, 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도 황량한 바람으로 몰려갔다. 몰려간 바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간다는 말 따위는 남기지 않았으니 기다릴 이유도 거기엔 없었다. 느닷없이 왔다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이별이 길 위에서 서걱거렸다. 겨울이라서 그렇다고 굳이 이유를 붙여가며 우기는 날들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꽃이 피고 가지마다 잎눈이 살을 찌워도 여전히 바람은 차고 의자는 비었다.
너에게로 이어진 길 위에 서서 먼 곳 바라만 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가지 않을 길이었다. 오지 않을 길이었다. 한 곳으로 몰려간 바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듯, 한 번 비어버린 의자는 수다가 즐겁지 않을 여름을 만날 터였다. 여전히 햇살은 뜨겁고 사람들은 섬처럼 이어진 그늘을 징검다리 삼아 몰려다닐 터였다.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게 불고, 그늘은 짙어 땀방울을 식히겠지만 그게 다였다. 그늘에 기대 이어지던 이야기는 빛바랜 사진 하나 남기지 않고 입을 닫았다. 저 홀로 푸르렀다 붉어갈 단풍나무와 더는 찾는 이 없을 의자 하나가 봄볕에 졸았다.
“정말, 정말 그랬어? 너무 웃긴다. 하하하”
잊힐 말들이 이명으로 윙윙 거리는 날에...
아사달의 담담淡談2017 0411: 담담은 일상의 이야기 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 피워내는 연꽃처럼, 맑은 이야기 풀어내고 싶은 소망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