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군자 없는 마당이었지만....
몇 해 전 매화나무 묘목을 한그루 얻었다. 종일 삽질로 허리가 휘는 날들이었다. 서울 사리를 접고 내려온 고향에서도 밥은 먹어야 했고, 벌이보다 앞서 쓸 용처는 먼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술도 몇 병 사야만 했고, ‘끊어라, 끊으세요!’ 입을 모아 노래하던 담배도 두어 갑 사야만 했다. 살아 숨을 쉰다는 명분 하나 만으로도 자질구레한 것들은 필요했다. 세상 공짜는 없는 법이니 당연 돈이란 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삽을 들고서 나무를 캤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징한 노동이다. 몸뚱이를 놀린 만큼 하루해가 저물었다. 새벽을 깨워 일터로 가고 서산에 기운 해를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었다. 머릿속 가득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하는 일들은 없었다. 자연의 시간에 보조를 맞춰 눈을 뜨고 햇살 따가우면 굵은 땀방울 뚝뚝 흘리면 그만인 단조로움이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넓게 포장된 도로에는 쉼 없이 자동차가 물결로 몰려가고 있었다. 농촌의 소도시라고는 하지만 읍을 이룬 마을은 대도시에 못지않게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구급차는 시간이 멀다 하고 ‘삐뽀삐뽀’ 경적을 울리며 지나쳤다. 촌각을 다투는 소리다. 누구의 사연인지, 어떤 사연인지 알 수는 없다. 알 수도 없는 사람의 목숨이 삶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을 터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마를 맞대고 산다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목도해야 하는 치열한 삶의 사투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시는 그래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너와 나의 경계가 그래서 필요했을까? 담장을 높이고 벽을 쌓아 잠들지 못할 사연을 차단했다. 방음벽을 두르고 자물쇠를 촘촘히 채웠다. 그래야만 스치듯 스며드는 사건과 사고에서 나를 분리시키고 차단할 수 있는 삶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날 선 삶의 언저리에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매화나무가 자랐다. 가시가 사나운 나무였다. 지켜야 할 말들이 많았는지 나무는 가지마다 날카로운 가시를 곧추 세워 자랐다.
남녘의 꽃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한 지 한 달포는 지났을까? 산수유가 피고 이내 매화가 피었다고 했다. 삼월, 찬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앞 다퉈 꽃소식은 전파를 타고 마을에서 마을로, 집에서 집으로 날아들었다. 봄을 먼저 알리는 전령사 노릇을 하는 꽃 중 으뜸이 매화꽃이기도 했다. 눈을 이고 피는 매화는 ‘설중매雪中梅’라고 해서 말 꽤나 한다는 선비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초라하지 않은 꽃잎에다 달빛 은은한 밤 십 리를 간다는 향기는 또 얼마나 은은한지, 매화꽃은 그래서 청빈한 선비를 닮았다. 군자의 꽃이라 칭송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터였다. 봄을 기다리던 선비는 툭툭 매화꽃잎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장지문을 열어젖히고서 대청마루에 걸터앉았을 터였다. 마당에서 뒤란으로 불어 가는 바람엔 겨울이 여전한데 추운 줄도 모르고 꽃을 바라봤겠지. ‘곱구나, 고와!’ 입에 달고 사는 임이어도 그렇게 반길 수는 없을 터였다. 한동안 넋을 반쯤 빼놓고서 바라봤을 매화였다.
매화가 피었다. 꽃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식상할 만한 시간이어도 상관없다. 지천으로 피고 진 꽃잎이 이미 과거의 어느 날로 변했다 하고, 입방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사람에겐 이미 전설의 고향쯤 되었다 해도 그렇다. 마당 한 자락을 차지한 조그만 매화나무에 꽃 봉오리 열서넛 어금니를 앙다물 듯 맺혔다. 구급차 시끄럽게 사투를 벌이던 길가에서 종일 매화나무를 캐고 얻은 매화나무다. 이태의 시간이 지난 오늘 매화꽃이 터졌다. 새벽을 몰아내고 피었을까? 매화꽃 터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툭툭’ 매화꽃은 소리로 먼저 피었을 터였다. 매화는 피는 꽃이 아니다. 소리와 함께 터지는 꽃이다. 듣지 못했으니 아쉽다 할 밖에. 정화수 한 사발 받아 들고서 귀라도 닦아내고 맞았으면 좋았을 매화였다.
“선비도 없는 이 누옥에 고맙게도 찾아주었구나. 고마운 일이야, 고마운 일!”
너스레를 떨면서 꽃 한 번 바라도 보고 향기도 두어 번 맡아보았다. 반가운 임 오신 듯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달 좋은 밤, 달빛처럼 드리울 향기를 기약하면서...
아사달의 담담淡談 2017 0413: 담담은 일상의 이야기 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 피워내는 연꽃처럼, 맑은 이야기 풀어내고 싶은 소망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