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것들은 늘 지루하고 무료하다
이별은 시원하고 달콤했다
일을 끝마치고 작업복을 벗는다. 먼지가 뽀얗게 묻은 작업복은 하루의 수고로움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묻은 먼지는 하루의 몸짓을 이야기한다. 흙 밭에서 일을 했는지, 모래밭에서 일을 했는지, 작업복에 껌딱지로 붙은 놈들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마른 풀도 서넛 달라붙어 고자질로 바쁘다. 신발에는 굵은 모래가 들어가 발바닥을 괴롭혔다. 털어내도 막무가내로 들어가 발가락 사이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을 때의 거북함은 뭐라고 말을 할까. 등골 한가운데 손은 닿지도 않는데 심하게 가려울 때의 난감함이 이럴까 싶기도 하다.
꽃길로 수놓아진 길을 걸어 성큼성큼 해가 기울면 불편하고 난감한 시간과도 작별을 맞는다. 땀으로 젖은 작업복을 벗는 것은 이별이다. 불편하고 고단한 시간과의 이별이니 서운하다거나 아쉽다는 생각은 없다. 시원한 이별이고 작별이다. 학수고대란 말을 붙이기엔 좀 과하다 싶지만 그런 만큼의 시원함이 있다. 뒤돌아보며 아쉬움에 몸서리치지 않아도 되는 이별이 몇이나 될까 싶은데, 그 아쉽지 않은 몇 안 되는 이별 중 하나가 하루 일과와의 이별이다. 미련 없이 신발을 벗고 옷을 벗는다. 종일 답답하게 옭아매던 양말도 벗어 들고 탈탈 먼지도 털어낸다. 달라붙지 말고 떨어져라. 이왕이면 달라붙었던 흔적 한 올 남기지 말고 떨어져라. 중얼거리며 양말이며 옷이며를 주섬주섬 벗어던진다.
개운한 시간이다. 옷을 벗어 떨어낸 시간과 시원한 이별을 하고는 이내 순간온수기에 가스밸브를 열어 불을 붙인다. 따뜻한 물이 필요한 시간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을 가득 받고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선다. 얼굴이며 팔뚝이며 온통 얼룩이 가득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은 바람에 마르고, 먼지는 덩달아 석고처럼 굳어 묵직하다. 머리엔 뽀얗게 서리가 내렸다. 마른버짐 피듯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샜다. 제법 사납게 불던 바람은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산발을 만들었다. 생전 빗이라곤 만져도 보지 않은 모습으로 거울 속에 촌놈 한 명이 마주한다. 봄볕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을 내보낸다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는 듯 봄볕에 그을린 사내의 얼굴이 까무잡하게 반짝거린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며 팔뚝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건강하게 보여 보기에 좋다 말하는 게 오히려 낫다 싶다.
샴푸를 하고 비누칠을 한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거품이 좋다. 향기로운 거품과 적당히 따뜻한 물이 한없이 편안하다. 서너 잔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몸은 노곤하고 근육은 풀어져 나른하다. 쏟아지는 물을 정수리로 받으며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게으름은 행복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게으름은 세상 가장 편한 자유였다. 생각도 멈추고, 고민도 멈추고, 시간마저 멈춰도 좋을 시간이다. 봄은 꽃으로 가장 바쁜 시간을 달음박질치고, 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 사랑을 부른다. 그래서 바쁘고 짧은 봄날은 뉘엿뉘엿 저물었다지만 그건 그들의 시간이고 일과였다. 거품 가득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나는 그저 이별의 달콤함에 온갖 게으름의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멈췄다. 더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을 시간과 마주한 나는 그래서 세상 가장 행복한 게으름뱅이다.
정말 좋은가? 묻게 된다
텔레비전을 켜고 버둥거린다거나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린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은 시원하게 흘러내려 목 줄기를 간질거린다. 나쁘지 않다.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간지러움이 아니다. 물가에 한가로운 수양버들 수면을 쓸 듯 머리카락이 그렇게 목을 쓸었다. 낙엽이 뒹굴고 주전부리 껍데기가 뒹굴던 마당 쓰윽쓱 쓸어가던 빗자루의 경쾌함이 거기에 있었다. 시원하다. 정갈하게 쓸린 흙 마당에 벚꽃 한 잎 나비로 날아드는 기분이라 해도 좋았다.
“아, 정말 시원하다. 좋다, 좋아”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떠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가? 이렇게 하루 산다는 게 정말 좋더냐?”
아, 그러다 보면 갑자기 허무하단 생각이 몰려간다. 물리칠 수 없는 무력감이 엄습을 하고, 이내 우울함이 단짝으로 곁들여진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묻게 된다. 길은 암울하고 사방에 안개 자욱하듯 길을 살필 수가 없다. 오리무중이다.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를 들고 삼백 예순 다섯 날을 헤매는 기분이 든다. 일 년 내내 카메라를 들춰 매고 산천 경계를 돌아친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지 않을 날들이었다. 피사체는 흔들렸고 빛은 뒤섞여 혼재되었다. 빛은 섞여 결국 남는 것은 백색의 광원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조차도 뒤섞였다. 물감이 섞여 칠흑 같은 밤으로 남았다. 밤길은 늘 그렇듯 어두워서 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오금이 오그라들어 더는 걸을 수 없을 때 길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정말 좋은가? 이렇게 하루하루 산다는 게 정말 좋더냐?”
길의 끝에선 어김없이 수많은 물음들만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아사달의 담담淡談 2017 0416: 담담은 일상의 이야기 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 피워내는 연꽃처럼, 맑은 이야기 풀어내고 싶은 소망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