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뿔 고뿔

못 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듯...

by 이봄


백 여일만의 상경이었다

아직도 코밑이 얼얼하다. 고뿔이 들었었다. 봄비 촉촉하게 내리던 날 무작정 버스를 탔다. 정오의 시보가 땡땡 울렸을 때 비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쯤에나 시작되려나 하면서 올려다본 하늘은 먹빛 구름이 잔뜩 성을 내고 있었다. 바람 끝에는 잔뜩 습기가 묻어났고 막 이파리를 움틔우던 나무들은 키 큰 풍선처럼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서둘러 일을 마무리할 무렵 정오가 되었고 비는 그렇게 내렸다. 일을 접었다. 오후의 온전한 시간이 비었음을 말하는 비였다. 하릴없는 오후가 선물로 주어졌다. 빨갛다거나 개나리처럼 노란 리본 하나쯤 곁들여 날아든 선물은 아니었지만 겉모양이야 어떻든 뭐가 중할까. 갑자기 빈 시간이 앞에 놓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작업복을 벗었다. 먼지 뽀얗게 묻은 작업복은 거추장스러운 뱀의 허물이었다. 벗어야만 성장하는 뱀은 미련 없이 허물을 벗었다. 바닥을 기어가거나 혹은 나뭇가지 위에 똬리 틀었다가 날카롭거나 모가 난 곳에 허물의 일부를 붙잡아 매듯 걸어두고서 스르르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그러나 과감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허물을 벗으면 한 뼘쯤 자라날 몸뚱이가 거기에 버티고 서있는 거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더는 꾸지 않았을 때 성장은 멈추었다. 성장의 매듭은 단단하게 매였다. 허물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감았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꼭 가야만 하는 곳도 있을 리 만무한 나였지만 뭐랄까? 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은 많은 각설이라도 좋았다 할까. 머물러 있을 이유도 또한 없는 하루였다.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멈춤 없이 내려라 주문을 외었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지금처럼 주룩주룩 소리도 시원하게 내리길 소원했다. 빗속을 뚫고 달리는 버스의 질주는 가볍고 경쾌했다. 쏴아 몰아치던 여름날의 소낙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수리 위에서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땀방울 쏟아내게 하던 태양은 징글징글했다. 손바닥 만 한 그림자도 하나 없이 뙤약볕에서 일을 해야만 할 때 태양은 더는 희망이라거나 숭배의 원천일 수 없었다. 다만, 외나무다리에서 만나야만 하는 원수였다. 으스대며 의기양양 거들먹거리는 몸짓이란 생명을 품어 살찌우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먹감자 아낌없이 하늘을 향해 날리곤 했다. 그럴 때에 몰아치는 소낙비를 뭐라 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시원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풋사랑 아련한 인연까지야 꿈꾸지 않아도 좋을 소나기였다. 내리는 봄비가 그랬고, 그 비를 뚫고 질주하는 버스의 그것이 또한 소나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뿌연 차창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연두색 파란 이파리가 지천이었고 빗방울에 고개 숙인 철쭉이 곱다고 생각했다. 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봄은 봄다워야 했고, 강요되었다 해도 사내는 사내다워야 했다. 연인은 연인으로 행복해야 했고 아이는 아이로 재잘거려야 했다. 비 내리는 창밖은 분명 그런 얼굴로 스쳐가고 있었다.

마늘과 쑥이 필요했을까?

서둘러 달려온 그곳엔 변함없이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빗물 흘러내려 뿌연 문 뒤로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고들어 앉아 있었다. 한결같은 모습이다. 수염은 까칠하고 깡마른 얼굴엔 여전히 안경 하나 댕그라니 얹혀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문을 열면서 내가 말했을 때 그가 말했다.

“어, 어쩐 일이야? 전화도 없이...”

“어쩐 일은 무슨. 비 오시니 낮술이나 거하게 한 잔 하자고 왔지. 나갑시다. 어서...”

가게가 빤히 내다 뵈는 곳에 자리를 만들고 술을 시켰다. 안주도 하나 간단하게 시키고서 잔을 건네고 받았다. 쓴 술이야 원래 입에 써야 했지만 참으로 달다고 했다. 목을 타고 흐르는 술은 알싸하게 썼지만 결코 쓰지 않았고 부드럽기는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랐다. 낮술에 취하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에 취했고 때로는 살아가는 고단함에 취하기도 했다. 뭐 별 것 있다던가? 추임새도 넣어가면서 시작된 술은 그렇게 세상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100여 일만의 외출이었다.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일 월 초의 상경에 이은 외출이었다. 계절은 어느덧 낯빛을 바꿔 봄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호랑이와 곰도 사람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시간, 100일을 훌쩍 넘긴 상경이었지만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마늘과 쑥을 먹지 않아서 그랬을까? 기원의 마음이 부족하다거나 간절함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말은 발붙이지 못할 시간이었다. 나름의 간절함과 나름의 기원이 어지럽던 계절이었고 시간이었다. 너무도 많은 시간과 일들이 켜켜이 쌓인 곳이었다. 끊어낼 수 없는 무게의 시간이 있었고 추억이 있었음에도 결국 난 홀로 그 길을 걸었다. 흔들리는 몸뚱이보다 흔들리는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 잊어야만 하고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태풍처럼 불었어도 납작 엎드려 아스팔트를 붙잡은 미련은 미동도 없었다. 그게 슬펐고 아팠다.

비는 그쳤고 버스는 끊겼다. 길은 멀었으므로 걸을 수도 없었다. 한낮의 술 동무는 둥지를 찾아 가버렸고 나는 둥지 잃은 새였다. 비가 그쳤으니 비를 피할 처마를 찾을 일도 없었다. 자리를 옮겼다. 상처에 빨간약이라도 바르듯 술잔을 기울였다. 취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아니, 더는 쓰라리지 않을 수 있다면야 취함이 옳았다. 술이란 녀석은 그래서 좋았고 늘 친구로서의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오라는 사람 없던 외출은 그랬다. 외로움 덕지덕지 달라붙은 허물을 벗어던지고, 빗길을 달려 그곳에 닿았지만 결국 외로움 하나 더 달아야만 했다. 청하지 않은 것들은 슬며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은근슬쩍 팔짱을 끼고 손을 잡았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것들은 보통 그렇게 낯이 두꺼웠고, 발도 마당발을 자랑했다. 돌아오는 길, 차창엔 햇살이 반짝였다. 어제의 기원은 무참히 날아가 먼지가 되었을 터였다. 재채기를 연신 뱉어내더니 급기야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들 중 재채기와 사랑이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터져 나오는 재채기는 막을 수가 없고, 사랑에 들뜬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숨을 가다듬고 호흡을 멈추어도 한 번 시작된 재채기는 막을 수가 없었다. 하루를 꼬박 콧물 훌쩍거리면서 일을 했다. 정신없던 하루가 지나고 다행스럽게도 수도꼭지 틀어놓듯 하던 콧물이 멈추었을 때 코밑은 헐어 화끈거리고 아렸다. 어쩜 그렇게 세상 아리고 쓰라린 것들이 많은지.

“아이고, 제기랄 고뿔이네. 고뿔이야! 오라는 임은 오간데 없고 뭔 놈의 고뿔이더냐. 백일치성이고 뭐고 개뿔 쓸데가 없구나....”




아사달의 담담淡談 2017 0424: 담담은 일상의 이야기 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 피워내는 연꽃처럼, 맑은 이야기 풀어내고 싶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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