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피었습니다

#03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by 이봄

그대는 이미 꽃으로 피었습니다.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고 시인은 노래했다지만 그대는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이미 꽃으로 피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겨울바람은 사납고 매서웠습니다. 옷깃을 여며도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바늘로 찌르듯 따가운 날들이었습니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물은 입을 다물어 고요하고, 얼어붙은 살가죽 위로는 웅웅 바람만이 울었습니다. 낙엽은 떨어져 신작로 위를 몰려다니고, 이파리 하나 매달지 못한 나목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숲에서 엉키고 설켜 눈물 찍어내고 있었습니다. 들도 춥고 산도 그랬습니다. 초록은 단풍으로 타올랐다가 바스락바스락 소리에 깨어지고, 이내 산등성을 넘어오는 바람 앞에서 와락 먼지로 부서졌습니다. 허허로운 이별입니다.

보이는 것들이나 들리는 것들 모두 쓰라린 이별 앞에서 꺼억꺼억 울음을 삼켜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움트는 것이라곤 버석 이는 서릿발이 고작입니다. 비 온 뒤 솟아나는 죽순처럼 서릿발은 찰나의 순간에 우뚝 솟았다가 햇살 퍼지는 시간이면 순간에 무너져 이별을 맞았습니다. 땅 가죽을 기어 다니던 서리는 잔뜩 모래를 머리에 이고 일어섰고, 허공을 서성이던 서리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꽃처럼 피었다가 스러졌습니다. 겨울이란 계절은 결국 이별의 시간입니다. 엎드릴 수 있을 만큼 엎드리고, 웅크릴 수 있을 만큼 웅크려야만 하는 계절에 그대를 만났습니다.

운명이란 말은 늘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야기라고 믿었습니다. 극적인 반전이나 억지스러운 말의 잔치에 고명으로 올려지는 지단과도 같은 말이 운명이라거나 숙명이란 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연이란 말은 또 얼마나 반복적으로 사람을 현혹하는지 끌끌 혀를 차게 만들었지요. 너무나 뻔한 이야기의 끝에는 언제나 조롱박. 매달리듯 운명이 매달렸고 그 곁에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숙명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별이 유난을 떨던 그 계절에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다 그대를 만났습니다. 만남보다는 이별이 가득한 시간 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우연히 만났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스쳐가는 인연이었습니다. 그러던 둘이 어느 날 말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허공을 오가는 문자가 전부였지만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들은 말에 살을 붙여 온기를 더했습니다. 말들이 쌓이고 시간이 더해지더니 심장이 생겨나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혈관이 뻗어나갔습니다. 마침내 오가는 문자에도 따뜻한 온기가 돌았습니다. 말들은 구들을 덥히는 장작이 되고 연탄이 되었습니다.

누구는 제 눈에 안경이라고도 했고, 또 누구는 콩깍지라고도 했지만 뭔들 어떻습니까. 어차피 안경은 내 눈에 맞아야 하는 거고, 세상이 향기롭다면 기꺼이 콩깍지를 써도 괜찮았습니다. 칼바람 불어 가는 들녘에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안경과 콩깍지가 피워낸 꽃입니다. 마른 들풀 꺾어다가 화병 가득 꽂아두어도 향기롭습니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내게로 와 그대는 꽃으로 피었습니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의 복판에 서서 어찌나 향기로운지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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