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있잖아, 네가 정말 좋아
썼다가 지우고 머리카락 몇 번이고 쥐어뜯다가도 돌아서면 헤벌쭉 웃고야 마는 게 있다. 구겨진 편지는 가을 낙엽으로 수북이 쌓이고, 끝도 없는 형용사의 호출은 결국 새벽을 깨웠다. 어디서 읽었거나 아니면 주워 들었다거나 하는 말들을 찾아 밤을 새워야만 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건 늘 그랬다. 말이 되는지 어쩌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문맥이 맞는지 돌아볼 여력도 없이 미사여구를 불러내어 횡설수설 말들을 늘어놓았다.
"오늘, 별이 아름다워. 그것도 유난히 반짝여서 왜 그럴까 생각해 봤어. 그랬더니 너 때문이더라고 ㅎㅎ"
생각해 보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을 판이었지만 이미 반쯤 넋을 놓은 남자는 주절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별은 총총, 바람은 산들' 어쩌고저쩌고 떠들다가 입술에 침을 발라야 했다. 그나마 거짓말이 아니어서 마른침을 입술에 찍을 이유도 없었는데 어찌나 침은 마르고 입술은 타던지 몰랐다. 유치한 말들이 춤을 춰서 문제였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머리를 온통 점령한 말들이 그랬을 뿐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사랑일지도 몰라. 그저 사랑이란 말을 떠올렸을 뿐인데 얼굴은 덩달아 붉어지고, 심장은 뜨겁게 요동쳤다. 터질 것만 같이 심장은 뛰었고, 얼굴은 또 얼마나 뜨겁고 붉었는지 심장 터지는 순간에 토마토 으깨지듯 얼굴마저 터질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피 끓는 청춘의 풋사랑이 세월을 덧입어 더는 설레지 않던 날에 어른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이 없어 어른인지 아니면 어른이어서 설레지 않았는지 때때로 헷가리는 세월을 남자는 살았다. 마른 잎 서걱대는 가을을 살고 있었다. 싱그럽게 돋아나는 새싹은 없었다. 움트는 것 없이 허허로이 낙엽만 뒹굴었다.
"봄이 왔으니 여름은 지척이요,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 오는 것이야 주야장천 되풀이되는 자연의 섭리 아니겠어!"
내민 입술과 치켜든 턱주가리 주억거리며 마른침 퉤퉤 뱉고야 마는 남자의 오늘이다.
멋대가리라고는 약으로 쓰려고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던 남자가 문득,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뀔 적에 겨드랑이 사이에 책 한 권 꽂고 상념에 잠겼다. 보아하니 꼴에 '상실의 가을' 어쩌고 하는 시詩집이다.
"뭐야? 뭐래?"
징그러운 바퀴벌레라도 보았는지 마주치는 사람마다 수군수군 소곤소곤 입방아로 턱이 다 아팠다. 남자는 생각했다.
"아, 중년의 설렘은 이다지도 잘근잘근 씹어야 맛이 나는 오징어 다리라도 되는 걸까?"
그렇지만 한동안은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시집은 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달달 새콤 시집 한 권 끼우고서
"있잖아, 네가 정말 좋아. 아니, 어쩌면 널 사랑하나 봐!"
헤벌쭉 달뜬 마음으로 동네를 거닐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그렇게 싱겁거나 모지란 놈이어도 마냥 좋을 그여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