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남자는 돼지갈비가 먹고 싶었다. 그것도 달큼한 양념갈비가 먹고 싶었다. 워낙 식탐이 없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그렇게 당기는 음식들이 있었다. 냉면 마니아를 자처하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떠올라 찾게 되는 평양냉면 같은 먹거리가 그런 것들이다.
남자가 이십여 년을 넘게 일하던 곳은 충무로다. 지금이야 대부분 강남으로 떠나서 영화인의 거리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고, 논현이나 신사동으로 떠난 디자인 회사들이고 보면 예전의 명성은 한낯 전설이 되었지만 그래도 명맥을 굳건히 이어가는 맛집들이 많다. 사람이 몰리고 돈이 따라붙던 동네다 보니 웬만한 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잡을 수 없는 곳이어서 오래된 맛집이라고 하면 적어도 대를 이은 집이라야 겨우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을지로의 을지면옥이라던가, 필동의 필동면옥, 오장동의 함흥냉면, 충무로의 부산 복집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맛집들로 가득한 곳이 충무로역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얼굴을 내민다. 계절에 따른 식욕이 거기서 만들어진 것 같다. 때 되면 떠오르는 맛이 몸에 각인되었다 할까? 겨울이면 골목 가득 배어있던 청국장의 꿈큼함이 저절로 떠오르고, 여름 비 촉촉이 내리면 삼수갑산 순댓국이 몸을 깨웠다. 콩나물무침에다 깍두기 그리고 깻잎장아찌가 찬의 전부인 자반고등어구이집도 그렇다. 때 되면 먹고 싶어 지는 기억들. 남자의 비쩍 마른 몸뚱이와 전혀 상관도 없을 법한 '먹고 싶어?'라는 생각이 그래서 웃기는지도 모르겠다.
애호박 하나를 만난 건 배부르게 돼지갈비를 먹고서였다. 주차장 한편을 호박 덩굴이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째 불볕더위가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정오를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축 늘어진 호박잎 사이로 연둣빛 고운 얼굴로 애호박 하나가 남자를 반겼다. 사실, 반겼다기보다 남자가 오히려 반가웠다고 하는 게 옳겠다 싶다. 소낙비라도 한 차례 몰아치고 가면 으레 호박전 지글지글 부쳐내고 막걸리 한 잔 사발 가득 부어내던 기억이 좋았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까만 눈 점점이 멀뚱 거리는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던 애호박 찌개야 여름을 건너는 징검다리 같은 맛이기도 했다. 때 되면 떠오르고 철 되면 생각나는 맛 중 하나가 남자에겐 애호박의 맛이다.
'줄 긋는다고 호박이 수박이 되랴?'라든가, '호박 같이 못 생겼네!' 하는 따위의 비하의 말도 있지만 호박만큼 추억으로 남는 맛도 없지 않을까.
반딧불이 까만 어둠 속에서 반짝이면 소년은 호박꽃 하나 잘라 들고서 반짝이는 불빛을 좇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 맺히도록 뛰어 잡은 반딧불이는 이내 호박꽃 속에 갇혀 호박 등이 됐다. 은은한 달빛처럼 호박꽃 속 반딧불이 깜박이면 의기양양 소년은 평상에 누워 여름밤의 별을 바라보고 달을 봤다. 시원한 산바람이 찰랑찰랑 별을 흔들었다. 손에 쥔 달빛도 덩달아 찰랑거리던 여름밤이었다.
추억이 쌓인 입맛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아련함이 있다.
때론 가슴 저미는 아픔이 있고 때론 벙그레 미소 짓는 웃음도 있다. 소낙비와 애호박 하나 소반 위에 놓으면 재잘거리는 추억들이 소란스러운 이유가 거기에 있을 터다. 호박이면 어떻고, 수박이면 어떻랴. 다 각자의 몫이 있다. 남자도 저만의 몫을 살면 그만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