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백수가 되던 날에 죽마고우 넷이 모여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송년의 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넷이 모였으니 술병은 테이블을 채우고 수다는 넘쳤지요. 마음 열어 말을 한다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몇 달을 입을 닫고 살았거든요. 말은 늘 꼬리를 물고 늘어져 어떻게든 흠을 잡혀 다툼이 되는데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동안 목구멍에 거미줄을 친 시간입니다.
수다스러웠습니다. 봇물 터진 말은 마른땅을 적셨습니다. 술 한 잔에 취해 소환된 추억은 새록새록했고, 잘근잘근 씹게 되는 어제는 고소하고 맛있었습니다. 허물없는 친구는 그런 거겠죠. 말이 꼬이고 마음에 주름이 잡혔다 해도 훌훌 먼지 털듯 털어낼 수 있는 감정입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백수의 홀로인 저녁입니다. 할 일도, 어디를 정해놓고 가야 할 일도 없습니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뒹굴거릴 겨울만 남았는 데 행복합니다. 겨울잠 자는 곰탱이 한 마리로 살아도 좋을 시간이라서 내일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두려 합니다. 쉼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삭혀야만 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지쳤지요. 정말입니다. 의욕은 달아난 식욕처럼 돌아올 기미도 없습니다. 좀 쉬어야겠다 했습니다.
동짓날입니다. 어영부영, 슬금슬금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합니다. 더는 신을 양말이 없을 정도로 살림은 물 건너가고, 느느니 술이요, 게으름만 가득했습니다. 서랍장 가득 봄, 여름 그리고 겨울용 양말이 가득했는데 어느 날 서랍이 텅 비었더군요. 양말만이 아니라 셔츠며, 바지며, 재착용도 불가한 빨랫거리만 세탁실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을을 보냈구나 하게 되더군요. 마음이 심란해서 손에 잡히는 일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거죠. 그냥 산다는 건 끊지 못한 숨 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귀찮고, 의미도 없고, 더는 아침햇살 떠오르지 않기를 기도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할까요.
오늘도 그렇습니다. 대단한 이야기 쓰려는 것도 아닌데 붓을 들어 첫 자음을 쓰고 오늘은 벌써 한 주가 되었습니다. 첫 이틀이야 친구들과 떼로 몰려간 시간이라고 핑계를 대겠지만 그러고도 닷새가 지났습니다. 백수가 된 마음 간단하게 남기고 싶었는데 말은 동쪽의 햇살로 놀고, 마음은 석양의 노을로 데면데면하더군요. 말은 가시를 세우고 마음은 빗장을 닫았습니다.
어제오늘, 다섯 번의 세탁을 했습니다. 망가진 건조대를 버리고 새로 건조대를 샀습니다. 따끈한 바닥엔 두꺼운 청바지를 널고 가벼운 놈들은 건조대 칸칸마다 널었습니다. 길게 드리워진 빨랫줄에 바지랑대 높이 세우고서 파란 하늘 벗 삼아 양말이며 셔츠들 나부끼게 하고 싶네요. 어쩐지 옥살이하듯 답답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