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 한 사발

열무김치 시원하게 국수를 말고....

by 이봄

때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 누구에게나 몇몇 쯤은 있게 마련이다. 비 내리는 날에 찾게 되는 고소한 파전이라든가, 야구광 김대리가 텔레비전을 켜고 앉아 저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고야 마는 치킨도 그렇다. 무조건적인 반응이다. 추억이 쌓인 음식일 수도 있고, 오로지 강열한 맛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적혈구처럼 몸뚱이 깊은 어딘가에 꽁꽁 숨었다가 마침내 때가 되었다 싶으면 슬며시 깨어나 옆구리를 찌르고야 만다. 난리법석 요란을 떨거나 시끄럽게 난장을 치는 것도 아닌데 종일 웅얼거리는 노래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거부하거나 밀쳐낼 수도 없는 은근한 고백, 봄날 연분홍 진달래가 산천을 물들이면 기어코 떠올라 가슴을 헤집고야 마는 첫사랑이다. 순이의 손에 덥석 쥐어주고서 한 걸음에 달아나던 연애편지가 김칫국 한 사발로 부활할 때 냄비에선 국수 삶을 물이 바글바글 끓었다. 국수 한 줌 끓는 물에 풀어주고 오이도 송송송 채를 썬다. 이것저것, 요것 저것 부산을 떨 일도 없다. 시원한 물에 헹군 면발 다소곳이 말아놓고 시원한 김칫국물 얌전하게 부어주면 끝이다. 열무국수 한 사발 뚝딱, 아니면 김치말이 국수도 얼렁뚱땅 소반에 앉았다. 땀방울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면 유독 김치와 면이 생각났다. 서늘하게 땀을 식혀주고 까끌한 입맛을 달래 배 두드리게 했다. 잘 익은 김치는 그랬다. 어미의 손맛에다 아련한 추억까지 한데 버무려진 맛이다. 초복이니 말복이니 절기를 따질 때면 그랬던 것 같다. 하기는 굳이 복더위에 끼워 맞출 일만도 아니다. 동치미 시원하게 익으면 밀가루 한 사발 퍼다가 치대던 반죽이며 널따랗게 펴서 밀던 칼국수는 또 어떻고. 후루룩 후룩 목을 타고 국수가 넘어가면 으레 소름 두어 사발 돋고야 말았다. 이불 뒤집어쓰고 먹는 동치미 국수는 소름 돋게 시원했다. 시도 없고 때도 없이 스멀스멀 생각나는 것들이 입맛을 돋우고 추억을 소환한다. 따끔따끔 옆구리를 찌르면 마냥 행복한 사람들이 어느 골목 어귀를 점령할 때다. 늘어선 줄은 길고 저마다의 추억은 가마솥 걸린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았겠지. 누군가는 치맛자락 잡아끌며 보챌지도 모르겠다.

"엄마, 엄마 빨리.... 엄마 응...."

밥솥에선 구수하게 뜸이 들고 아궁이 위에 김칫국 한 사발 시원하게 익어간다.

"아롬아, 뭐해?"

문자를 보내고 남자는 싱겁게 웃었다. 나이 쉰을 넘기고서 이렇게 노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어머머, 뭐야? 유치하게.... 왜? 그냥 있어 호호호"

"몰랐어? 나 원래 유치해.... 좀 유치하게 놀자. 아로미? 얼마나 좋니? 귀엽기만 하네. 너랑 딱이야!"

게다가 사랑을 하면 유치해진다느니 너스레를 떨던 남자가 말했다.

"강석이가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대. 모임에서 두어 번 본 여자라는데 은근 맘에 든 눈치야"

"어머, 정말이야? 잘됐다.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여자가 반색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여자의 질문이 이어졌고 남자는 대략의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의 친구는 국수를 사랑하는 모임이란 이름의 밴드 활동을 한다고 했고 우연히 참석한 정모에서 그를 만났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싫지 않았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만의 데이트도 하게 됐다고 했다. 맛집을 찾아 밥도 먹고 근교의 분위가 좋은 카페를 찾아 커피도 마셨다고 말을 전하던 친구는 들뜬 마음이 역력했다.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한 친구는 얼마 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렸을까? 약속을 정하고 데리러 오가는 길은 또 얼마나 가슴 콩닥였을까? 남자와 여자는 온갖 상상을 더해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정말 설레는 인연이었으면 좋겠다고도 했고, 뜨겁게 연애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강석이가 그럴지도 몰라. 넷이서 같이 밥이나 먹자. 늘 우리 사이에 끼어 부러워했잖아..."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어떤 여잔지 보고도 싶어"

남자와 여자에게 둘은 이미 뜨거운 연인 사이로 발전을 했고, 맛있게 끓인 라면을 사이에 두고 후후 입바람 불며 면발을 식히고 있었다. 도심의 뒷골목에서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며 유혹하는 모텔도 하나쯤 찜을 했고, 쌍쌍으로 먹을 맛난 음식도 이미 정해두었다. 호호 깔깔 상상의 날개는 창공을 날았고 오리배도 하나 구해 등 떠밀고서 둘만의 데이트도 만들어 줬다. 거침없이 진행된 연애는 날만 잡으면 될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일사천리 즐거운 상상이었다. 그러던 날에 남자의 친구는 모임의 번개모임에 간다고 했다. 그녀도 같이 참석한다고도 했다.

"그래 재밌게 놀다 와. 비도 오고 오늘 분위기 좋다"

정말 잘 돼서 상상하던 것만큼이나 진도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했던가? 상상의 날개를 접어야만 하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음 날 늦은 오후에 문자가 왔다.

"뭐하니? 비 많이 오네...."

"응 그냥. 어젠 어땠어?"

이러쿵저러쿵 말을 잇던 친구 녀석이 그랬다. 자기밖에 모르는 성격이라서 접기로 했다고 했다. 응석받이로 자랐는지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그래서 잘 된다고 해도 그걸 받아줄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말 마따나 우리 둘이서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켰구나. 어째 너무 앞서간다 했다. 시원한 김치말이 묵밥이 생각났다. 요맘땐 묵밥이 최곤데.... 갑자기 입맛이 썼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