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갛고 동그란 스탬프 하나, '참 잘했어요' 환하게 웃으면 머리 쥐어짜던 시간마저 덩달아 웃었지요. 손가락 발가락 모두 다 불러내어 더하고, 빼고 꾹꾹 눌러쓰던 숙제는 늘 머리에 쥐가 나고 자라지도 못한 허리는 어찌나 아프던지 모릅니다. 그나마 삐뚤빼뚤 마친 숙제는 손바닥을 얼얼하게 맞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여서 이내 졸음이 쏟아지고는 했지요. 마치지 못한 숙제는 악몽으로 되살아나 밤새도록 괴롭히기 일쑤였어요. 플라스틱 자를 치켜든 선생님은 째진 눈으로 어찌나 쫓아다니던지요. 숙제란 놈은 그랬습니다. 달걀귀신이나 뿔 달린 도깨비 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놈이었는데도 때때로 까맣게 잊히기도 했지요. 주섬주섬 가방을 싸다가 '아뿔싸!' 이마리를 때리고야 맙니다. 까마득히 잊었던 숙제가 하필 이제야 생각이 날까요? 심장은 벌렁거리고 오금은 저립니다. 등굣길은 흡사 마라톤으로 변하고야 말았습니다. 대문을 벗어나자마자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입니다. 10분 아니, 단 5분이라도 빨리 교실에 도착해야만 합니다.손가락 발가락을 불러낼 틈도 없었습니다. 베껴야지요. 다행히도 짝지 녀석은 숙제를 해왔더군요. 연필은 춤을 추고 글씨는 날아다녔습니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는 또 어찌나 컸는지 모릅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지요. 제발 1분만 더를 중얼거릴 때 똑똑똑 복도를 울리며 구두 소리가 다가옵니다. 검정 도포에 검정 갓을 쓴 저승사자가 옅은 미소와 함께 교실 문을 열어젖히려고 합니다. 달아날 구멍은 없습니다. 머리를 풀숲에 처박은 꿩의 새끼가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먹잇감에 흥분한 맹수는 걸음을 재촉하고 이빨을 드러내고야 말지요. 사냥은 더욱 집요하고 날을 세운 발톱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그때 뚝하고 연필이 부러집니다. 참 절묘한 순간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짠 듯이 연필이 부러질까요? 손바닥은 벌써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탁탁탁 장단을 맞추며 자를 놀리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강요도 물론 없습니다. 이상하지요? 언제부터인가 숙제 검사를 앞둔 꼬맹이처럼 노트 한 권을 펼쳐 들고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사시나무처럼 떨기까지 합니다. 청탁받은 원고를 보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각서 백장쯤 쓰고서 약속을 한 사실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떨리는 가슴으로 교탁에 올려놓을 숙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숙제 검사를 앞둔 꼬맹이가 빤히 쳐다보고야 말지요. 아침부터 입에 붙은 노래를 퇴근길까지 흥얼거리듯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치고야 마는 원수들이 드잡이를 하기도 하고, 눈물 콧물 쏙 빼고야 마는 이수일과 심순애가 영화 한 편 찐하게 찍기도 했지요. 말들은 알아서 짝을 짓고 알아서 헤어졌습니다.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말리지 않으면 분명 선혈이 낭자한 활극도 한 편 만들 터였고, 우주로 날아간 원숭이도 한 마리 불러올 터였습니다. 법당의 고요를 깨는 죽비라도 들어야 할 판입니다. 수다스러운 말들을 불러 줄을 세우고 눈 흘기는 놈들은 화해도 시켜야 했습니다. 부끄러워 입도 떼지 못하는 녀석은 다독여 말문을 열어줘야만 했지요. 그렇게 올망졸망 세운 말들이 제법 봐줄 만하다 싶으면 이내 졸음이 몰려와 곯아떨어지지요. 단잠을 잤습니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맹수는 더는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헐떡거리며 뛸 일도 없었고, 하필이면 그때에 부러지는 연필도 없었지요.
참 잘했어요. 빨갛게 찍힌 스탬프 하나가 햇살처럼 눈부십니다. 등 떠미는 사람도 없는데 오늘도 노트 한 권 펼쳐 들고서 줄을 서게 됩니다. 그래야만 말갛게 갠 하늘을 볼 것만 같아서 연필 몇 자루 곱게 깎았습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을 어르고 달랜다는 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때로는 악몽에 시달리는 숙제일 때도 있지요. 웃기는 일입니다. 누구는 종일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종일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되지요. 누가 시켰나요?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이라도 하던가요. 다 그렇습니다. 손바닥 얼얼하게 노려보던 큰 자가 언제부터인가 내 손에 들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에도 단잠을 자겠지요. 말들이 좋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