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깔 좋은 귀신

발그레 웃어봐요

by 이봄

"뭐여 그 있잖여. 알지도 몬하면 말을 말랬다고.... 다 그런겨.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얼굴 발그레 혀믄 덜 무섭고 좋잖여...."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남자들이 왁자하게 떠들었다. 듣는지 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씹고 있던 파전은 파전대로 열을 올리고, 삿대질을 섞어가며 침을 튀기던 남자가 갈증이 났는지 술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을 때 맞은편에 앉았던 남자가 기회다 싶었는지 말을 끊었다.

"야야? 시끄럽고.... 너, 많이 바쁜가 보다. 인마, 아무리 바빠도 술잔은 채워주면서 바빠야지. 그래? 안 그래?"

맞은편의 남자가 빈 술잔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둘은 분명 죽마고우였을 터다. 발가벗고 뛰놀던 유년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함께 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대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육두문자가 거북하지 않아서 그랬고 취기가 오를수록 달달 해지는 시선이 또한 그랬다. 어떤 말이든 다 받아줄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 말꼬리 잡기로 씩씩거리다가도 이 내 씨익 웃어버리면 눈 녹듯 사라질 언쟁은 차라리 귀여웠다. 꼬맹이들 마주 앉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티격태격하다가 동시에 우앙 울음 터지는 말싸움이었다. 빈 잔에 술을 따르면서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말야 밥 좀 챙기면서 다니라고 인마! 뭐 있냐? 다 먹고살자고 뼈 빠지게 일하는 거지. 얼굴이 그게 뭐냐 새꺄?"

핼쑥해진 친구의 얼굴에 부아가 치민 친구가 잔소리를 쏟아냈다.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지 연거푸 술잔을 비우면서 먹고 죽은 귀신에 대해 논문 한 편을 풀어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저 웃고 있었다. 마누라의 따가운 잔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흐뭇하고 따뜻한 미소가 번지고 있는 걸 보면 남자는 유년의 행복했던 한 때로 이미 빠져들었을 터였다. 시큼한 싱아 한 다발로 세상 부러울 것 없었고 난생처음으로 이웃집 참외를 서리하던 날 젖비린내 떨어내고 마침내 어른이 다 됐다 싶었던 뿌듯함으로 행복해했다. 잔소리를 듣는 내내 남자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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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음엔 쏙 드는데 가벼운 지갑을 걱정해야만 하는 것처럼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당장은 무리다 싶어서 망설이게 되는 찜찜함을 한 방에 날려 줄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그 확고부동한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만지작만지작 손을 떼지 못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마음은 제동을 걸었다. 참아야지. 기껏해야 그것도 못 참냐?, 고 핀잔이 날아든다. 아니지, 핀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잇값도 못한다고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남자가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건 크래커 한 봉지다. 짭조름하고 바삭한 과자 한 봉지를 들고서 망설이고 있었다. 마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했다던 연극의 대사처럼 남자의 문제는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입이 궁금하다고 해서 그때마다 입을 달랠 수는 없었다. 먹어 행복한 끝자락엔 후회의 순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160이니 200이니 눈 앞에서 깜박이는 숫자가 저승사자처럼 달려들었다. 경고의 메시지고 협박이었다. 몰라 방치됐던 당뇨가 이것저것 문제를 일으켰다. 발등의 불은 껐다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널뛰기로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당을 일정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니 기껏해야 과자 한 봉지를 쉽게 뜯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다.

"뭐여 그 있잖여.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얼굴 발그레 혀믄 덜 무섭고 좋잖여...."

등 떠밀어 말 하나 앞세우고서야 마침내 과자 봉지는 뜯겼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지 뭐. 매일매일 그러자는 것도 아니고 오늘만 아니, 지금만 그러자고 타협을 했다. 게다가 꼬박꼬박 밥을 챙기고 부지런을 떠는 자신에게 상 하나 주자고 했다. 그래도 된다고 위로했다. 남자의 오후가 지는 석양처럼 발그레 붉어졌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남자는 크래커 하나 바삭바삭 씹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좋아서 웃었고 애 같아 부끄러워 웃었다. 미처 몰아내지 못한 말이 째려봤다.

"아이고 화상아! 기껏해야 그것도 못 참냐?"

그러거나 말거나 과자는 바삭바삭 소리도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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