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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해 말아요

나도 그럴게요

by 이봄

장마전선은 연일 잰걸음으로 한반도를 휘젓고 있었다. 어제는 남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폭우를 쏟았고 오늘은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 남부를 강타했다고 했다. 오르락내리락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꼴이다. 옮겨가는 걸음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도로는 침수되고 방파제는 떠내려가 더는 배를 품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매 시간마다 '뉴스특보'를 편성해 내보냈다. 현재의 기상상황이며 지금까지 집계된 피해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데스크에 쌓이는 원고는 간결했다. ○○시, 지하차도 침수로 50대 남성 1명 사망. □□군, 저수지 수문 개방으로 과수농가 침수 피해 발생. 수확을 앞둔 농가의 시름 깊어.... 간혹 피해주민과의 인터뷰를 내보내기도 했지만 감정이 배제된 뉴스는 간결하고 빨랐다. 인명 피해도 한 줄, 과수원의 침수도 한 줄이면 충분했다. 감정의 배설이야 아침 드라마 한 편이면 차고 넘쳤다.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세뇌하듯 스며드는 억지는 때로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면 하단을 스치는 자막처럼 뉴스가 나오던 화면엔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중년의 배우가 우리들의 회장님을 열연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뉴스를 보며 남자는 점심을 먹었다. 며칠 전 강화도에서 사 온 순무 김치가 매콤하고 아삭해서 입맛을 돋웠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한동안 고생을 했던 남자는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서 한참을 씹었다. 오래오래 씹으면 아무래도 소화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였다. 오물오물 우물우물 밥알이 씹혔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없더라도 곤두서지 못할 밥알이다. 온통 신경은 거기에 닿아 있었다. 어떻게 하면 밥을 더 잘 씹을까? 주머니에서 퇴출당한 위장약은 분명 열심히 잘 씹은 결과물이었다. 여전히 하천을 뒤로하고 선 기자는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흙탕물로 가득한 하상 주차장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차들이 징검다리처럼 배경화면으로 버티고 섰고 연신 기자는 피해상황을 나열하기에 바빴지만 결국 문제는 밥알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씹을 수 있을까였다. 어쩌면 우리들의 회장님이 뒷목을 붙잡은 까닭도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잦아들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가끔 젖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질주음이 경쾌하고 시원했다. 반쯤 빗물에 불은 전단지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것처럼, 자동차는 시원한 소리를 남겨두고 떠났고 다시 시작된 빗소리는 남자의 점심상에 제법 어울리는 배경음악으로 흘렀다.

"야? 니들 화요일에 뭐하냐? 시간 되면 화요일에 래춘이 축하 파뤼나 하자. 어때?"

어둑어둑 어둠이 내릴 때 하나 둘 찾아든 녀석들은 '괜찮냐?' 안부를 묻기에 바빴고, 어디 뭐 저승이라도 다녀왔다더냐 너스레를 떨어 남자는 화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천만다행이란 말이 어울릴 응급상황이었음은 분명했다. 오른쪽 다리로 내려가는 혈관이 막혔다고 했고 이후 추가 검사로 확인된 부위는 가슴을 쓸어내리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가슴을 관통하는 동맥이 막혔다고 했다. 관상동맥의 일부가 막혀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한다고 했는데 다리 쪽이 아닌 심장의 혈관이 먼저 막혔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고 검사 결과를 설명하던 젊은 의사는 다행이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었다.

"야! 쨔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다. 축하해!"

술잔을 들어 남자와 친구들은 건배를 했다. 물론 남자의 잔에는 맹물이 채워져 있었다. 불판 위에선 지글지글 고기가 구워졌고 비워진 술잔은 이내 채워졌다. 거기까지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직전의 시간, 혀가 꼬여 말이 취하기 이전까지의 순간이 남자를 위한 파티였다. 몇 순배의 잔이 더 돌고 각자 개인방송의 볼륨을 높이기 시작했을 때 남자는 이미 술자리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밀려나 있었다. 마시던 술병을 가리키며 빨리 마시고 그만 일어서자 재촉을 했고 취한 놈들은 한 병 더를 외쳤다. 이구동성 어찌나 한 입으로 잘도 통하는지.... 그래, 마셔라! 언제 또 이렇게 다 모여 마시겠냐? 한 발 남자가 물러섰다가도 이내 다시 채근을 하고야 만다. 맹숭맹숭 맨 정신으로 술자리의 서너 시간은 곤욕스러웠다. 게다가 혈관을 뚫은 발은 아직 쑤시고 저렸다. 집으로 돌아가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만 일어나면 안 될까?'와 '한 병만 더!'가 말씨름을 했다.

이타利他와 이기利己 문제가 아니다. 공감과 비공감의 얘기일 수도 없다. 혀가 꼬이기 직전까지의 말이 녀석들의 마음이었다. 걱정되고 안타까운 마음, 하지만 말이 비척거리기 시작하면 사고의 반경은 좁아들고 중심엔 내가 우뚝 서게 된다. 누구나 다 그렇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으니 입술 삐죽 내밀어 서운함을 토로할 이유도 없다.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떠드는 뉴스라고 어디 다를까? 안타깝고 안됐다. 억장이 무너져 눈물 쏟다가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게 되는 것, 세상이 온통 우울과 슬픔에 빠져 허우적이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터였다.

"자니? 뭐해?"

짧은 문자가 날아들었다. 그녀다. 잡생각에 멍 때리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입가엔 벌써 찢어지게 미소가 번졌다.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다.

"자기는 무슨.... 지난 글들 찾아 읽어보고 있었어. 다시 읽어도 좋더라. 그때 내 마음이 보여서...."

옆으로 밀어두었던 글씨를 찾아들고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그녀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메모 한 줄을 썼다.

"날마다 사랑해.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야!

말마다 좋아해. 그럴 수 있어서 참 행복해!"

지난 시간을 서성이다가 하나 확인한 게 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가슴에 맴도는 말이 있어 글씨를 쓰다 말았다고 했다. 이러쿵저러쿵 뜸을 들이던 남자가 짧은 문장 하나 더 그녀에게 보냈다.

"있잖아, 난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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