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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종이紙 종이

비 잦아든 날에 나는....

by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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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요란을 떨었는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새벽이 걷히고 희뿌옇게 동틀 무렵

후닥닥 투닥 비가 내리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가는 날은 장날이었고 마침

장터 골목 어느 누란에선 청사초롱

불 밝히고 백년해로 연을 이었나 보다.

기름 냄새는 진동하고 떡메 소리는 담을 넘었다.

쩌렁쩌렁 천둥이 치고

낮밤을 쪼개 번개가 번쩍였다.

놀란 마음에 부뚜막에선 자라 몇 마리

기어 다니고 솥뚜껑은 저 혼자

마당을 서성거렸다.

개다리소반 받쳐 들고 엉덩짝 살랑거리던

찬모는 '옛다. 냉수나 먹고 속 차려라!'

물사발 덜렁 내놓고야 만다.

어허, 거 참.... 고약하고 야박하다.

문전박대에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선 남자는

무에 그리 흐뭇했던지

"고약해서 반갑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일세.

어허, 거 참 처음이야...."

맑은 바람에 맑은 이야기 샘솟듯 솟아나면 얼마나 좋으랴만 황톳빛 흙탕물만 넘실거리는구나!


뭐든 적당한 게 최고다.

과해도 욕을 먹고 모자라도 구박을 받는다.

세상 살아가는 지름길이기도 해서

중간쯤 가는 게 제일 편하다는 둥

말들이 많기도 하다.

넘치거나 모자란다는 건 눈에 띈다는 말이고

눈에 띈다는 건 그다지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어울렁 더울렁 뒤섞여 티 나지 않게

모름지기 그래야만 정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침이 지나쳐서 징글맞은 장마다.

장맛비는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홍수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붓을 들어 편지라도 써야 할 판이다.

"너의 위세는 등등했고 몸짓은 가히 천하를

호령했으니 이제 그 족함을 알고

물러감이 어떠할까?"

그런다고 물러설 네가 아니니 어쩌랴.

"정을 든다 한들 내려칠 하늘은 끝이 없고

쪼갤 땅은 드넓기 그지없구나!"

남자는 중얼거리면서 두루마리 곱게 펴고

화선지 몇 장 만들었다.

둘둘 말린 종이야 일정하게 펴고 접으면

까만 먹물 흐르듯이 멈추듯이

걸판지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를 터였다.

펴고 접은 종이 과도로 잘라내면

향긋하고 달달하게 꽃송이로 피고 질까?

어떤 놈이 그랬던가?

사과 껍질 얇고 길게 한 번에 깎아내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그도 아니면

예쁜 마누라를 얻는다고 했다던가.

다만 나는 향기로운 말 꽃처럼 피고 지길....

"어허, 손에 쥔 그건 뭐요?"

지나치며 묻길래 또 그리 대답했지.

"뭐긴 뭐요? 그저 종이지...."

끌끌 혀를 차며 또 말을 이을 터였다.

"그럴 때가 아닐 텐데.... 비 잦아들었으면

손수레 바삐 끌어 폐지라도 하나 더

주워야지. 뭔 놈의 화선지야, 화선지가...."

밥이 나와?떡이 나와?목구멍 끝까지

치민 말, 꾸역꾸역 참았겠지.

"그러게, 폐지라도 줍고 봐야 알량한

목구멍에 피죽 한 사발 부어줄 것을!"

종이는 종인데 뭔 놈의 종이 손에 쥐어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는지?

몸뚱이는 망가져 뚝딱뚝딱 망치질로 어지럽고

산 입에 거미줄은 빗방울 송골송골

매달고서 속 좋은 바보처럼

허허껄껄 예쁘기도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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