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갛고 동그란 스탬프 하나, '참 잘했어요' 공책 귀퉁이에 찍히면 머리 쥐어짜던 시간은 어느새 멀리 달아나고 말았어. 그게 뭐라고 까까머리 긁적이며 까만 밤을 밝히기도 했지. 손가락 발가락 모두 다 불러내어 더하고, 빼고 침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던 숙제는 늘 머리에 쥐가 나고 자라지도 못한 허리는 어찌나 아팠는지 몰라. 그때는 다 그랬지. 반듯한 책상은 꿈도 못 꾸던 때라서 방바닥에 길게 배를 깔고서 책도 읽고 숙제도 했었거든. 그러니 조막만 한 허리도 아팠던 거야. 그나마 그렇게 삐뚤빼뚤 마친 숙제는 손바닥을 얼얼하게 맞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였어. 아, 내일은 손바닥 맞지 않아도 되겠네 중얼거리다가 곯아떨어지곤 했어. 지금이야 어디 고사리 같은 손에다가 자를 휘두르겠냐만 그때는 '사랑의 매'란 이름으로 머리통도 때리고 손바닥도 때렸지. 그러니 끝마치지 못한 숙제는 악몽으로 되살아나 밤새도록 괴롭히기 일쑤였어. 플라스틱 자를 치켜든 선생님은 째진 눈으로 노려보며 어찌나 쫓아다녔는지 몰라. 무슨 숨바꼭질도 아니고 수수깡 더미에 숨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소리 죽여가며 다가왔어.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네. 숙제란 놈은 정말 그랬어. 달걀귀신이나 뿔 달린 도깨비 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었지. 이불 푹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고서 어디까지 왔나?, 빼꼼히 내다보곤 했지. 그렇게 무서운 놈이었는데도 때때로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했어. 주섬주섬 가방을 싸다가 '아뿔싸!' 이마를 치고야 말았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숙제가 하필 이제야 생각이 나는지? 심장은 벌렁거리고 오금은 저렸어. 눈알을 부라리며 커다란 자를 휘두르는 호랑이 한 마리가 교탁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는 걸. 이런, 죽었구나 죽었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부산을 떨 수밖에 없었어.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지. 그렇잖아?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제정신이라면 그게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거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웃기는 얘기야. 그 정신을 어떻게 차리냐고? 등굣길은 흡사 마라톤 경기로 변하고야 말았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말은 등 뒤로 멀어지고 대문을 벗어나자마자 냅다 뛰기 시작했지.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건 오직 하나야. 걸음아 나 살려라 냅다 뛰는 것뿐이지 뭐. 10분 아니, 단 5분이라도 빨리 교실에 도착해야만 했어. 심장은 터질 듯 요동치고 숨은 이미 턱까지 차올라서 헐떡거렸지. 마치 부푼 풍선처럼 가슴이 부풀었을지도 몰라. 바늘로 콕 찌르면 기다렸다는 듯 뻥 소리와 함께 터졌을지도 모르겠어. 바늘을 들고 달려든 녀석이 없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있잖아, 그 뭐야? 배 터져 죽은 엄마 개구리 이야기. 어느 날 아기 개구리가 풀을 뜯던 소를 보고서 엄청 놀라고 말았어. 어찌나 덩치가 크던지. 엄마는 늘 그랬거든.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크고 힘도 세다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보고 낮에 본 소 얘기를 꺼냈어.
"엄마, 엄마? 있잖아요. 아까 이상한 놈을 봤거든요. 머리엔 뿔이 나고 엉덩이엔 기다랗게 꼬리가 있었는데요 얼마나 크던지 마치 집채만 했어요."
아기 개구리의 호들갑에 마음이 상했던지 엄마 개구리가 정색을 하며 말을 했어.
"아가야? 뭘 보고 그러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만했니?"
배가 터져라 숨을 몰아쉰 엄마 개구리가 물었어.
"아니요,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더 컸는걸요!"
그렇게 숨을 몰아쉬던 엄마 개구리는 뻥 소리와 함께 터져 죽었다는 얘기, 그 미련 맞은 엄마 개구리처럼 말이야.
이젠 손가락 발가락을 불러낼 틈도 없었어. 언제 계산을 하고 정답을 찾고 있겠어. 베껴야지 더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다행히도 짝지 녀석은 숙제를 해왔더군. 연필은 춤을 추고 글씨는 날아다녔지. 째깍째깍 시계 소리는 또 어찌나 크고 빨랐는지 몰라. 마음은 급하고 시간은 자꾸만 줄어드는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은 주책맞게 흘렀어. 제발 1분만 더를 중얼거릴 때 똑똑똑 구두 소리가 다가오는 거야. 그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유리창이 부르르 떨고 교실문은 덜컹거리며 흔들렸어. 끼익 기괴한 소리로 문이 열리면 분명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 나타나겠지. 아. 제기랄! 욕이라도 뱉고 싶었을 거야.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에선 늘 구미호와 저승사자가 머리털을 곤두서게 했어. 드디어 오늘 그 저승사자를 만나고야 말 거야. 검정 도포에 검정 갓을 쓴 저승사자가 옅은 미소와 함께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거지. 달아날 구멍은 없었어. 머리를 풀숲에 처박은 꿩의 새끼가 오들오들 떨듯 책상 밑으로 머리를 처박고는 떠는 수밖에. 먹잇감에 흥분한 맹수는 걸음을 재촉하고 이빨을 드러내고야 말아. 사냥은 더욱 집요하고 날을 세운 발톱은 날카롭기만 했어. 그때 뚝하고 연필이 부러졌어. 참 절묘한 순간이야. 하필 그 순간에 어쩌면 그렇게 짠 듯이 연필이 부러질까? 손바닥은 벌써 벌겋게 달아오르고 어쩐지 얼얼하고 찌릿하기만 했어.
짜장면집 진짜루의 젓가락은 가끔 소환돼서 짜장 면발 같은 글씨를 쓰지. 내게 온 녀석의 숙제인 거야.
탁탁탁 교탁을 내리쳐 장단을 맞추고 때론 허공을 휘저으며 자를 놀리던 선생님은 더는 없었고, 꼭 그래야만 하는 강요도 물론 없었어. 참 이상하지?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숙제 검사를 앞둔 꼬맹이처럼 노트 한 권을 펼쳐 들고 줄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거야. 심지어 사시나무처럼 떨기까지 했어. 청탁받은 원고를 보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각서 백장쯤 쓰고서 약속을 한 사실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떨리는 가슴으로 교탁에 올려놓을 숙제는 없었어. 교탁에 쌓이는 공책을 노려보던 선생님은 아득한 전설로 잊혔는데 가끔 숙제 검사를 앞둔 꼬맹이가 빤히 쳐다보는 거야. 그런 거 있잖아. 아침부터 입에 붙은 노래를 퇴근길까지 흥얼거리듯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들이 있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치고야 마는 원수들이 드잡이를 하기도 하고, 눈물 콧물 쏙 빼고야 마는 이수일과 심순애가 영화 한 편 찐하게 찍기도 했어. 말들은 알아서 짝을 짓고 알아서 헤어졌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난장판이 따로 없었어. 말리지 않으면 분명 선혈이 낭자한 활극도 한 편 만들 터였고, 우주로 날아간 원숭이도 한 마리 불러올 게 뻔해서 법당의 고요를 깨는 죽비라도 들어야 할 판인 거야. 수다스러운 말들을 불러 줄을 세우고 눈 흘기는 놈들은 화해도 시켜야만 했지. 부끄러워 입도 떼지 못하는 녀석은 다독여 말문을 열어줘야만 했어. 그렇게 올망졸망 세운 말들이 제법 봐줄 만하다 싶으면 이내 졸음이 몰려와 곯아떨어지고야 말았어. 여름날의 평상에서 곤히 단잠을 자던 아이의 손에는 연필 한 자루 꼭 쥐어져 있었지. 하필이면 그때 뚝하고 부러지던 연필이 말이야. 숙제를 끝냈으니 집요하게 달려드는 맹수는 더는 쫓아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아침부터 헐레벌떡 뛸 일도 없었고, 책상 밑으로 숨어 오들오들 떨 일도 없었던 거야.잠은 달콤했고 꿈은 행복했어. 벼랑으로 떨어지거나 밤새도록 귀신에 쫓기는 꿈은 없었어.
참 잘했어요. 빨갛게 찍힌 스탬프 하나가 받아 들고서 헤벌쭉 남자가 웃었어. 오늘은 숙제 해왔어요!우쭐해진 마음으로 펼쳐 든 공책에는 삐뚤빼뚤 웃는 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뛰놀고 있었어. 때로는 물장구로 신난 아이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을 했어. 더는 등 떠미는 사람도 없는데 오늘도 노트 한 권 펼쳐 들고서 줄을 서는 건 뭣 때문일까? 날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화선지 몇 장 꺼내놓고서 먹물 또르르 접시에 따르는 건 또 뭐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어. 싱거운 시간이 싱겁게 흐를 때
"뭐야? 어디 아픈 거야? 요 며칠 꼼짝도 않고.... 글도 없고 캘리도 없네"
그녀의 문자가 날아들었어. 그러게. 요즘 뜸했지. 바쁜 것도 없으면서 바쁜 척 게으름을 피운 거지 뭐.
"아냐, 아프긴 뭐. 그냥저냥 시간이 지났네 ㅎㅎ"
"다행이야. 아픈 거 아니라니까. 그럼 글 좀 올려봐? 독자들이 기다리잖아. 요즘 너무 게으름 피우는 거 아냐? 호호호"
그녀가 웃었어. 독자가 기다린다는 말을 남기고서. 그랬지? 맞아, 네게도 기다리는 독자가 있었지. 가뭄에 콩 나듯 뜨문뜨문 몇몇이 기다리는 게 전부였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기다린다는 거야. 연필 몇 자루 곱게 깎았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을 어르고 달래서 이야기 한 줄 만들어야 했지. 연애편지 쓰듯이 글 몇 줄에다 글씨도 한 점 부리나케 쓰고서 그녀에게 보내야만 했던 거야. 별 것도 아닌 이야기 한 줄에 환하게 웃어주는 그녀가 마냥 예뻤거든.
웃기지? 누구는 종일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종일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돼.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가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연애편지를 쓰는 거야. 곱고 예쁜 편지 한 장 받아 들고서 환하게 웃어 줄 그녀를 생각하는 거지. 맞아, 더는 숙제 검사가 없는데도 날마다 침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는 숙제는 하루하루 쌓이는 연애편지이기도 하고 하루씩 만들어가는 인생일 거야. 두꺼운 앨범에 꽂아둘 사진 한 장씩 찍는 거겠지. 그것도 날마다 한 장씩.
"있잖아 그거 아니? 넌 글 쓰는 모습이 제일 멋지더라. 내가 그 모습에 반한 거잖아.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