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덕구 메리 쫑

그 이름을 아시나요

by 이봄

어렸을 적 얘기다. 골짜기를 끼고 개울이 흘렀고 개울에 기댄 좁은 농토였지만 논과 밭이 올망졸망 자리 잡은 마을에 소년은 살고 있었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집과 집 사이는 멀어서 골목 같은 건 없었다. 채마밭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집이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둥근 박처럼 초가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널따란 마당에서 이영을 엮고 새끼줄을 꼬았다. 김치 안주에 막걸리가 사발로 돌고 왁자하게 웃음꽃이 필 때 성미 급한 사람은 벌써 지붕에 올라 묵은 짚을 걷어내기에 바빴다. 묵은 짚을 걷어낼 때에는 오동통 살이 오른 굼벵이가 몇 마리씩 꿈틀거렸다. 마당을 서성이던 늙은 수탉은 신이 나서 달려들었고, 개울 건너 김 씨네 아주머니는 '훠이 훠이' 닭을 쫓아내며 굼벵이를 챙겼다.

"거 참, 이리 와서 막걸리나 한 잔 하슈. 굼벵이는 닭이나 먹게 두고.... 그런다고 뭐 별이나 뜨겠어요. 하하하"

"모르는 소리 마요. 이게 그렇게 좋다잖아요. 살도 통통하니 힘깨나 쓰겠구먼. 호호호"

뭐가 그리 좋은지 주거니 받거니 호호 하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었고 김 씨 댁 아주머니는 끝내 수탉과 씨름하며 굼벵이를 챙겼다. 가을날의 마당은 분주했지만 마치 잔칫집 같이 한껏 들떠 있었다. 덩달아 부뚜막의 가마솥은 연신 허연 김을 씩씩거리며 뿜어냈다. 가을이면 늘상 벌어지던 풍경이다. 오늘은 김 씨네 내일은 개울 건너 박 씨네 하는 식으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초가지붕을 곱게 단장했다. 지붕의 처마부터 돌려가며 덮어가던 이영은 용마루의 덮개 이영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는데 정작 초가지붕의 마지막 마무리는 냉면사발 뒤집어 씌우고서 잘라주던 단발머리처럼 처마 끝의 볏짚을 깔끔하게 잘라 주는 거였다. 어린 누이의 단발머리처럼 곱게 다듬은 초가지붕은 반달을 닮은 듯도 했고 누런 바가지 하나 엎어놓은 듯도 했다. 높다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서 우묵히 자리 잡은 마을에 우묵히 자리를 잡은 집들이 가을볕에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었다. 어쩌면 돌아 앉아 젖을 물리던 어미의 젖가슴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랬을 터였다. 형제 고개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마을은 늘 포근하고 정겨웠다. 마을이 보이고 멀리 집이 보이면 소년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을 참으며 내달리다가 깨금발로 돌아서기도 했는데 언제나 헐거워 벗겨지던 검정 고무신이 말썽이었다.

"에이 씨, 또 벗겨졌네.... 정말 된장이다. 된장!"

소년은 벗겨진 고무신을 흘겨보다가 싱겁게 웃었다. 밥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솟고 꺼졌던 백열등이 하나 둘 불을 밝혔다. 어느새 가슴에도 백열등 하나 똑딱 소리를 내며 켜졌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신작로는 곧게 뻗어있었다. 오가는 차는 많지 않았지만 가끔 툴툴 거리며 달려가는 차는 뽀얀 흙먼지를 꽁무니에 매달고 달렸다. 울퉁불퉁 패인 흙길은 비 오는 날이라야 겨우 먼지 구덩이에서 벗어났지만 벗어나기 바쁘게 누런 흙탕물을 튀기기 일쑤였다. 뭐 그랬다. 흙먼지나 흙탕물이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래도 학교를 오가는 신작로는 곧고 넓은 멀쩡한 길이었는데 학교가 일찍 파한 날이면 멀쩡한 길을 놔두고 오솔길 먼길을 굳이 골라가며 걸었다. 물길 옆으로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밭둑이며 논둑길을 건너 찔레꽃에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잘 자란 싱아도 한 아름 뜯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돼지 막골이라 부르던 골짜기다. 어쩌다 지게 가득 꼴을 짊어진 아저씨와 마주치는 게 오가는 사람의 전부여서 길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책가방 둘러맨 어린 녀석이 다니기엔 제법 무서웠을 길이었지만 종종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골짜기를 막 벗어나며 만나게 되는 집은 박 씨 아저씨네 집이었다. 대문은 늘 닫혀 있었고 바깥 마당엔 컹컹컹 두어 번 짖다가 이내 꼬리를 치던 검둥개가 있었다. 이름은 덕구였다. 온통 검정뿐이라서 검둥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만 같았지만 검둥이는 덕구였다. 덕구는 덩치가 제법 커서 어른들도 놀라 뒤로 물러서고는 했지만 사실 덕구는 점잖고 얌전한 개였다.

"덕구야 또 보자! 잘 있어..."

한참 덕구를 쓰다듬어 주다가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을 때 벌써 밤나무집 쫑이 짖기 시작했다. 쫑은 흔히 발바리라 부르는 조그만 녀석이었지만 오히려 덕구 보다도 앙칼지고 사나운 개였다. 이름은 쫑이다. 쫑은 한쪽 눈두덩이가 손바닥만큼 까맣고 몸뚱이는 하얀 바둑이었다. 쫑을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살다 보면 서로 닮는다고 쫑과 그 주인인 밤나무집 아주머니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한 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짖어대고 달려드는 쫑이나, 마을을 온통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고 풍문을 만들던 아주머니는 형제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가끔은 아주 가끔은 아주머니도 바둑이처럼 변한 얼굴을 하곤 했다. 술 한 잔 거하게 드신 아저씨가 손찌검을 했는데 다음날이면 바둑이처럼 눈두덩이 벌겋게 멍이 들어서 동네를 오갔다.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런지 가리지도 않고서..,,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였다. 조심조심 아름드리 밤나무를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데 여전히 쫑이 거품을 문다. 친해지지 못한 동네 개 중 한 마리였다.

지랄 맞은 밤나무집 쫑을 뒤로하고 멀쩡한 길에 올라서면 집은 지척으로 가까웠다. 걸음은 빨라지고 집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대청마루에 가방을 벗어던지고 뒤란을 돌아서는데 어린 누이가 울고 있었다.

"왜 그래? 옥경아 왜 우는데. 울지만 말고 말해봐? 응?"

"오빠..., 오빠 우리 메리가.... 메리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여동생은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었다. 그러고 보니 외양간 옆에 묶여있던 메리가 보이지 않았었다. 이런 그랬구나. 년이면 서너 번 내려와 며칠씩 묵어가던 고모부는 처갓집에 올 때마다 덕구며 메리를 가리지 않고 하늘로 보냈다. 마당 한편에 자리한 화덕에는 장작불이 타고 커다란 양은솥에서는 연신 김을 뿜어댔다. 며칠이고 메리가 생각날 때마다 눈물 훔칠 누이여서 안타까웠지만 고모부의 복날은 덕구와 메리 그리고 가끔은 쪼끄만 쫑도 불러 세웠다. 반갑다고 꼬리 치던 녀석들은 영문도 모르고 하늘에 올랐다. 덕구, 메리, 쫑이면 온 동네 개들을 다 불러 세울 수 있었던 그때는 당연한 여름날의 풍경이기도 했다. 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덕구, 메리, 쫑이 dog, merry, john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단다. 물 건너온 꼬부랑 말이 고생이 심했던 시절에 꼬부랑 이름의 덕구들도 고생이 많았구나 할 뿐. 우는 누이를 달래주는 것 외에 할머니의 백년손님을 어쩌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