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뭘 좋아해?

널 잊고 살 자신이 없어_07

by 이봄


"넌 뭘 좋아해?"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어떤 대답이 나올까 귀를 쫑긋 세우고서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궁금함에 더해 재밌다는 표정이다.

"응, 나야 뭐 네가 알다시피 손으로 끄적이는 것들 좋아하고, 가끔은 책에 파묻혀 사는 것도 참 좋아해!"

뭔가 한참을 떠들 것처럼 들떠 시작된 말은 잠깐의 틈을 타고 꼬리를 내렸다. 휴~!' 하고 한숨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까지 들떴던 표정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추억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랬었어. 좋아하는 것들도 생각해보니 과거형이 돼버렸네. 등산도 좋아해서 전국 이름 꽤나 난 산들은 철을 바꿔가며 가기도 했었는데 이젠 그림의 떡이 됐어."

남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멈췄을 때 그녀가 말을 받았다.

"다시 또 다니면 되지? 뭘 그렇게 시무룩해하고 그래. 한 이삼 년 산에 못 간다고 그동안 산이 다 닳아 없어지기라도 한다든...."

별것도 아니라는 듯 그녀는 말을 받았고 쫑긋 세운 귀와 생글거리는 얼굴도 여전했다. 바라보고 있으면 유쾌함이 전염되는 그녀라서 더욱 좋았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니고 목소리도 그랬다. 살짝 톤이 높은 목소리는 언제나 통통 튀듯 발랄했고,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반짝였다. 그게 좋아서 한 번 시작된 전화는 귀가 뜨끈해지도록 끊지 못하는 날이 태반이었다. 우울한 마음에 시작된 말들이라도 언제나 그 끝엔 환한 햇살이 내리쬐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다시 가면 되지 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 없어지려면 수수만 년은 걸릴 텐데 뭣하러 걱정을 해. 참 걱정도 병이야. 그렇지? 하하하"

남자가 웃었다.

"근데, 있잖아? 끄적거리는 것도 좋고, 책이며 등산도 다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따로 있어!"

"그래? 그게 뭔데? 어서 말해 봐? 응? 응?"

여자는 짐작조차 못하겠다는 듯 남자의 대답을 채근했지만 사실, 남자의 대답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너무나 뻔한 대답이었고, 날마다 듣고 또 듣는 얘기였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는지 여자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말이었지만 말하려는 남자나 듣는 여자나 마치 처음이라도 되는 듯 떨리는 고백이었다. 수염이 거뭇해지고 목소리가 굵어졌을 때 단발머리 소녀가 눈에서 지워지지 않던 그때처럼 심장은 요동치고 목소리는 떨렸다. 길게 숨을 몰아쉬고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게 있잖아? 난 세상에서 그게 제일 좋더라. 그게 뭐냐면.... 난 네가 제일 좋아! 순이란 이름의 네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정말이야...."

"에이 뭐야? 정말 내가 그렇게 좋은 거야?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응? 말해봐 봐?"

재밌다는 듯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대답을 채근했고, 남자는 등 떠밀리듯 가쁜 대답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그럼. 다른 건 몰라도 난 네가 정말 좋아."

남자가 이렇게 말하면 여자는 분명 남자의 말에 꼬리를 달게 분명했다.

"당연하지. 싫을 게 뭐람?"

순이는 셀죽 거리며 말했다.

"맞아, 싫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당연히 좋겠지. 호호호"

듣는 귀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아직도 한낮의 햇살은 따가웠고, 볕에 나가 있으면 땀방울이 콧등을 차지할 판이었지만 둘의 말을 듣고 있자면 닭살이 돋을 수도 있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상관이 없었다. 내 마음이 그렇다는데야 뭘 어쩌겠어하는 식이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샌 나이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깊이가 깊어졌으면 더 깊어졌지 시큰둥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한가로이 시간이 흘렀다. 오후의 햇살은 느리게 비췄고 사람들도 햇살의 속도에 맞춰 느린 걸음을 걸었다. 아까워서 그만큼 좋은 시간이었고, 반대로 좋아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고 안타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잠깐 멈춤 버튼이라도 누르고 싶었다. 말 하나 몸짓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담을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아 간직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욕심이라도 부리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얘기해 봐? 응?"

어디가 좋은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콕 집어 말해보라는 순이의 말에 남자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난 너의 말투며 글이 좋았어. 그런 거 있잖아? 국적 없는 말이며 글들이 나는 정말 싫거든. 즐점을 하라는 둥 즐저를 하라는 둥의 너무 줄이고 자른 표현이 싫어. 무슨 유치원생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당나라 말도 아니고...."

남자는 말도 안 되고,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들이 정말 싫었다. 게다가 우르르 시류에 쓸리고 우르르 몰려가는 행태가 못마땅하던 차였다. 애들도 아닌 나이에 너무 유행을 좇는 꼬락서니에 알레르기가 날 정도였는데, 순이는 말투도 그러지 않았고 단 몇 줄의 글에도 그런 것이 없어서 우선 좋았다.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끊으며 순이가 말했다.

"뭐야? 내가 좋은 이유가 꼴랑 그게 다야? 실망인 걸? 내 미모는 다 어디로 가고?"

제법 토라진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정작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좋았고, 웃는 목소리가 좋아서 눈에서 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엄지공주라도 만들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그녀였다. 남자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고 모습이라서 더 좋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긍정적인 생각이 삶을 긍정적으로 바꾼다고 쉽게 말은 하지만 사실 긍정의 에너지를 채우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남자는 주변으로부터 종종 그런 말을 듣고는 했다.

"넌 다 좋은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우울한 거 같아. 네가 쓰는 글들도 좀 그래서 읽고 나면 나도 우울해지는 거 같아"

그녀는 맑게 갠 하늘에 동동 떠가는 흰구름처럼 유쾌하고 맑은 사람이어서 더욱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었다.

테트라포트로 둘러싸인 포구는 잔잔했다. 바람이 유난을 떨고 파도가 성낸 아가리로 달려들어도, 포구는 미동도 않고 고요했다. 해 질 녘이면 날갯짓을 멈춘 새들이 숲으로 모여들듯 먼바다로 나갔던 배들은 바람을 등지고 방파제 안으로 몸을 숨겼다. 성난 바람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듯 달려들다가도 방파제를 만나면 얌전한 고양이라도 된 듯 발톱을 숨기고 말았다. 그래도 달려들던 위세가 있으니 일제히 물러나기엔 자존심이 상했던지 부질없는 성깔로 몇 번을 더 달려들었지만 끝내 방파제는 넘지는 못했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뒤쫓던 파도도 마찬가지여서 철썩대던 파도소리도 요란을 떨었지만 테트라포트의 위세에 눌려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바람에 찢기고 파도에 상처 난 배들은 그제야 숨을 고르며 저마다의 상처를 핥았다. 포구는 위로였고, 고단한 몸을 누일 마지막 안식처였고, 도피처이기도 했다. 악몽으로 자지러지던 숱한 밤도 이내 스르르 졸린 눈을 감게 만드는 아늑한 품이었다.

생각해보니 남자에게 순이가 그랬다. 열불이 나고 한숨이 들어차다가도 순이를 떠올리면 마음은 가라앉고 안정을 찾았다. 파고들어 따뜻한 어미의 품이었고 뙤약볕에 드리워진 그늘이었다. 옷섶 매만져주며 눈인사를 건네는 사람이기도 했다. 밥은 먹었니? 안부를 묻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몇 날 며칠을 꼼짝도 않고 집에만 있다 보면 정말이지 석 달 열흘이 지나도 안부를 묻는 전화도 없었고, 생사여부가 궁금해 코빼기를 들이미는 사람도 없었다. 도심을 살짝 벗어난 외곽이라고 해도 분명 대도시에 살고는 있었지만 사람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도시에 있으나 아니면 외딴섬에 사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고립무원의 세상에 갇혀 남자는 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뭐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순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고 남자는 별것 아니라며 대답을 했다.

"아니야, 걱정은 무슨.... 너의 품이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서"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갑자기 품 타령은.... 아무튼 넌 엉뚱한 구석이 있어. 그거 알기나 하니?"


남자는 부끄러웠다. 소갈딱지는 꼭 밴댕이 만해서 심심치 않게 심통을 부렸고, 떼도 썼다. 갖고 싶은 걸 손에 넣으려고 가게 바닥을 뒹구는 어린애가 거기에 있었다. 심술보 하나 얼굴에 붙이고는 나만 바라봐요? 어깃장을 놓는 철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넓은 그늘에 앉아 다리품을 쉬어가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녀를 위해 양산 한 번 받쳐 든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이야 천 냥이 아니라 만 냥의 빚을 갚고도 남았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가진 것이 없으니 무슨 사기꾼도 아닌데 날마다 입으로 때우고야 마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말을 하고는 했다.

"좋아하는 만큼 가끔은 네가 밉기도 해"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배들은 방파제 안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너무 비좁다고 툴툴대고 있었다. 마음이란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달려드는 파도와 바람을 피해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정작 처마 밑에서 급한 비를 피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바꾸기 일쑤였다. 포구 밖에는 성난 파도가 아직도 때를 보며 쉬이 떠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숨을 돌린 배들은 입을 댓 발 빼 물고서 바람이며 파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가끔 튀어나오는 남자의 엉뚱한 말들도 포구로 피신한 배들과 다를 게 없었다.

"순이야 손 좀 줘봐?"

"왜 그래? 남들이 보잖아!"

주위를 둘러보며 부끄러운 듯 살며시 내민 순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순이야?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너 있어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래서 고맙고 미안해. 말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더는 입 밖으로 내밀지 못했다. 가슴이 뻐근하게 차오르는 말들이었지만 다만, 안으로만 품고야 말았다. 잡은 순이의 손은 따뜻했다. 팔딱이는 심장이 밀어낸 붉은 피는 온기를 품고 온몸을 돌았다. 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이 천 마디의 말보다 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럽다며 잡은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남자는 더욱 손아귀에 힘을 줘 손을 잡았다. 이대로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불 덮인 아랫목에 손을 넣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 따뜻하고 좋았다.

"넌 뭘 좋아해? 또 싫은 건 뭐가 있고?"

오래도록 가슴을 맴돌 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