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 닿기를...

널 잊고 살 자신이 없어_08

by 이봄


남자에게 버릇이 생겼습니다. 거리를 걷다가도 화단에 핀 꽃 한 송이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예쁘게 핀 꽃송이 요목조목 뜯어보다가 '녀석 참 예쁘게도 생겼네' 생각이 들면 바로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야 맙니다. 나비라도 한 마리 꿀을 빨고 있다면 비상상황입니다. 나비가 날개를 펴고 다는 꽃으로 날아가기 전에 찍어야만 합니다, 마음은 조급한데 카메라를 켜고 피사체를 좇는 과정은 굼벵이가 기어가고 말지요. 속이 새까맣게 타는 시간입니다. 짧은 그 몇 초의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을 떨고서야 겨우 셔터에 손이 가려는 순간, 나비는 고운 날갯짓으로 허무한 바람을 일으키고 맙니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얘야?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면 안 되겠니? 잠깐이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나비는 날아가버리고 남자는 나비의 꽁무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섰습니다. 찰나의 시간입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이나 들풀이라면 호흡을 가다듬고,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그만이지만, 나비나 벌처럼 매여있지 않은 녀석들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기다림의 미학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찰나의 미학이고, 순간의 포착만이 시간을 붙잡을 수 있었죠. 한동안 아쉬운 마음에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까만 꼬리가 정말 예쁜 녀석이었습니다. 나리꽃이 피기 시작하는 늦봄부터 얼굴을 내미는 제비나비였습니다. 까만 정장 곱게 차려입고 빨간 행커치프로 잔뜩 멋을 부린 녀석입니다. 뭐랄까요? 멋을 아는 녀석이고, 놀 줄 아는 멋쟁이 나비가 제비나비입니다. 놓친 물고기가 유난히 크듯 사진에 담지 못한 나비는 유난히도 곱고 예뻤습니다. 어디 한 군데 상처도 없었고 날개는 찢긴 곳 하나 없이 어찌나 햇살에 반짝였는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꼬리날개 쪽에서 떠오른 초승달은 몸통에 닿을 때쯤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어요. 밤하늘에 뜬 달을 닮은 무늬는 녀석의 백미입니다. 일곱 개의 달이 점점 차올라 밤하늘을 밝히고야 말지요. 남자가 알고 있는 나비 중에 제일 예쁘고 아름다운 나비는 제비나비였습니다. 짧은 조우가 만든 아쉬움은 길기만 했습니다. 다음이 또 있겠지 하며 자리를 떠야만 했습니다. 기껏 냄새만 폴폴 풍기다가 빼앗아버린 찌개처럼 입맛만 다시다 만 꼴입니다. 침만 꼴깍 솔리 내어 삼켰습니다.

어떻게 찍으면 좀 더 예쁠까? 내려보고 치켜보면서 부산을 떨게 됩니다.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은 바쁘기만 합니다. 셀 수 없는 사진이 찍혀 들고 있는 손이 묵직해지고야 말아요.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다고 우연히 얻어걸리는 사진이 있게 마련이어서, 물량에 승부를 걸게도 됩니다. 잡을 수만 있다면 백 번 인들 뒷걸음질을 못하겠어요. 남자는 갖은 자세를 취하곤 했습니다. 무슨 포토그래퍼도 아닌데 온갖 포즈를 취해가면서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것에도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땅바닥을 기어서라도 맘에 드는 사진 한 장 건질 수만 있다면야 마다할 그가 아닙니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습니다. 누구 눈치를 볼 이유도 없었고, 부끄러울 이유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오직 안중에 있는 건 그의 사진을 받아보며 활짝 웃어줄 그녀가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웃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가 보내는 문자에

"있잖아? 방금 보낸 사진은 정말 좋다. 어쩜 그렇게 예쁘게 담았니? 고마워! 두고두고 봐야지. 호호호"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받아쓰기 공책을 내밀며 한껏 기대에 부푼 꼬맹이가 됩니다. 어머나! 오늘은 틀린 게 하나도 없네? 한없이 따스한 눈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엄마를 바라보는 어린애처럼 남자도 그의 손길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뜯어보고, 만져보고, 한 차례 유난을 떨고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찍은 사진을 확인하게 됩니다.

"에이, 생각보다 사진이 좀 그러네...."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면 한참의 수고가 공염불이 되고야 말지만

"아, 생각보다도 훨씬 좋구나!"

중얼거리는 순간이면 세상 모든 걸 얻은 듯 하늘을 나는 기분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남자가 됩니다. 우쭐해진 마음에 저장된 사진을 서둘러 그녀에게 보내는 순간이 행복했습니다. 우체국에 들러 우표를 사고는 혀로 침을 발랐습니다. 네모칸이 쳐진 곳에 꾹꾹 눌러 붙인 우표가 떨어질까 재차 확인하고서 빨간 우체통에 넣는 연애편지였습니다. 잔뜩 달아오른 마음이 삐죽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이 꽃 어때? 참 예쁘지? 물론 너 보다야 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예뻐서 찍었어!"

너스레를 떨어가며 문자를 보내면

"아이고, 됐네요. 그거 알아? 이 정도면 너 지금 중증이야! 그래도 뭐 꽃은 참 예쁘네. 고마워^^"

함박웃음 같은 답문자가 오면 남자는 헤벌쭉 웃고야 맙니다. 그게 좋아서 길을 걷다가도 길가에 접힌 화단이며,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대상이 꼭 꽃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좀 특이하다 싶거나 의외의 반전이 숨은 거라면 무엇이 됐든 환영입니다. 살짝만 비틀어 생각하면 보이는 위트가 좋았고, 그것들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등짐으로 하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잠시의 수고로 얻는 것 치고는 너무나 큰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생각했습니다. 예쁜 것 하나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수고로움은 봄눈처럼 녹아버리고 없었습니다. 날마다 그녀를 생각하며 웃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온통 마음을 빼앗아버린 그녀가 생겼다는 게 꿈만 같았습니다. 이러다 꿈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게 사라질까 봐 겁이 날 지경입니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기를 남자는 빌었습니다. 돌잡이 사진을 찍으면서 온갖 아양을 떨어야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얻는 것처럼,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남자도 한바탕 아양을 떨었습니다. 바라보는 꽃들이 오히려 박장대소할 일이었겠지만 뭐면 어떻습니까. 오늘도 남자는 화단을 기웃거리다가 광대놀음에 흠뻑 빠졌습니다.

"우르르 까꿍! 얘야, 여길 좀 보렴? 여기...."

꿈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를 글로 쓰고 싶었고. 그녀와 주고받는 많은 말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었습니다. 다시 찾아온 설레는 마음을 오래도록 붙들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게 세월 앞에서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알기에, 침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던 일기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꺼내 볼 수 있는 책 한 권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보다 손쉬워진 출판 환경은 소위 자가출판이란 이름으로 얼마든지 손에 책을 쥘 수 있었지만, 남자가 생각하는 책은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발간되는 그런 책을 뜻했습니다. 명성 높은 공모전은 아니라도 일정 부분 공인된 작가의 꿈을 꾸는 거였고, 공인된 간행물을 원하는 마음이었죠. 한낱 허망하고 너무 거창한 꿈이란 걸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얼마나 좁고 높은 관문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만, 꿈에 비해 자신은 능력이 또 얼마나 보잘것없고, 형편없는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고 싶었습니다.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마른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들 용기이기도 했고, 앞뒤 가리지 못하는 무모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열병처럼 앓게 되는 사랑이란 게 그런 거겠죠? 없던 힘도 솟고, 가시밭길도 껄껄껄 웃으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면 눈에 뵈는 것도 없었고,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어서 부나방처럼 뻔히 타 죽을 걸 알면서도, 기꺼이 불속으로 날아들고야 맙니다. 남자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불속으로 뛰어들 마음입니다. 재고 말고의 문제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고, 오히려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아이들이 들으면 무척이나 서운할 얘기지만, 애들을 못 보는 서운함보다 그녀를 못 보는 서운함이 몇 곱절은 더 크고, 짙은 지 오래인 남자입니다. 명의 효자보다 한 명의 악처가 더 낫다는 말은 괜히 생긴 말이 아님을 남자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불도 켜지 않은 방에 누워 지나간 추억에 빠져든 남자가 가슴 설레던 시간을 떠올리고는 했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잠을 잘 수도 없던 시간입니다. 늘그막의 그가 다시 꿈꿀 수 있는 시간이 아니어서 그리웠을까요. 그렇게 다시는 열병에 빠질 일이 없겠거니 하던 남자가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에 온 마음을 빼앗겨 고열에 시달리고, 잠꼬대를 하듯 헛소리도 하게 됩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찰나의 순간에 목을 매는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지만 그래서 그럴까요? 사진 한 장만으로도 사랑은 뜨겁게 타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찰나 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스럽고 어처구니도 없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미 두 눈엔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는 걸요.

길을 걷다가, 마당을 서성이거나 밖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빼앗기는 시선과 생각들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꿈이라고 해서 모두 이뤄지는 것도, 이뤄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꿈 하나 가슴에 품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꿈이라고 해서 꼭 대단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어차피 사는 동안에 세월이 쌓이듯, 차곡차곡 말들도 쌓이게 마련입니다. 쌓이는 말들과 세월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책장을 열면 한눈에 들어오는 책들처럼 줄을 세우고, 표지도 씌우고 싶었습니다. 뒤죽박죽 섞이고 어지러운 말들이라면 훗날 반추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게 분명합니다. 많은 말들 중에 골라낸 것들에다 조금의 의미를 더해 단장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단지 그런 마음입니다. 그녀와의 모든 시간은 잊고 싶지 않은 의미였고,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꽃향기 풀풀 날리고 연미복으로 단장한 나비가 거들먹대며 날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여라도 아픈 추억을 꺼냈을 때에도 눈물 시원하게 쏟고 나면 엷은 미소쯤은 짓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젊은 연인이 프랑스 어느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그림이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온통 달달한 말들이 꽃처럼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연인들의 말이야 굳이 귀담아듣지 않아도 뻔했습니다.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는 말들입니다. 요즘 남자도 입에 달고 사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라면 나이도 상관없이 유치하게 변하고야 맙니다. 남자의 시선을 빼앗은 건 말이 아니라 그림입니다. 해변을 걷는 연인을 보다가 생각했습니다. 둘이 해변을 걸어보고 싶다고 남자는 생각했습니다.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걷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벗어 든 신발과 맨발에 찰랑이는 파도가 좋았습니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덩달아 웃음소리도 번 바다로 바람에 날아갔습니다. 거칠 것 없는 자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국의 해변이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멀리 가버린 꿈은 정말 한낮의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 뻔해서, 조금은 현실적인 바다를 떠올렸습니다. 하긴, 어디가 중요할 이유도 없습니다. 같이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을 뿐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여태껏 함께 해본 게 별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좀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저어습니다. 해본 일이 없는 만큼 앞으로 해볼 일이 그만큼 많구나'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과 해본 것들이 꿈으로 날아오릅니다. 엄지손가락 곧게 세우고서 말을 합니다.

"예쁜 것들 여기여기 붙어라!"

주문을 걸어 모인 꿈이며 예쁜 것들 모두 너에게로 가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함박웃음으로 돌아오는 답문자 한 줄이면 남자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