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1, 인천광역시 중구 을왕동 산 68-10
사진에 기록된 촬영 날짜와 위치정보는 이랬다. 바닷가의 지번이 산이란 것도 남자는 그때 처음 알았다. 해수면에 접한 야트막한 산이야 지번이 산이라고 해도 뭐랄 것이 없었지만, 밭이며 논 보다도 더 낮게 드리워진 백사장이 산이라는 얘기는 조금은 의아했고,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부동산에 관련된 직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유를 알아둔다고 해서 딱히 지식의 넓이를 자랑할 것도 아니라서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세상 궁금하고 의외다 싶은 것들이 어디 하나 둘일까? 설령 수영장만 한 뇌를 가졌다고 한들 세상 모든 궁금한 것들을 파고들어 미주알고주알 알아야만 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는 궁금증은 가뜩이나 골머리를 썩여야 하는 세상살이에 고달픔 하나를 더하는 꼴이었다. 識字憂患을 몸소 시전 하는 것 외에는 득이 될 게 없었다.
9월의 첫날이니까 절기를 떠나 달력으로 느끼게 되는 가을이기도 했고, 절기상으로도 입추를 지났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던 하늘은 불현듯 반짝 햇살을 비추기도 했고, 바람 한점 없다가도 느닷없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댔다. 널뛰듯 까불대는 날씨가 가뜩이나 을씨년스럽던 해변을 쓸쓸함으로 채웠다. 그래서 그랬는지 철 지난 해수욕장엔 사람보다 많은 갈매기가 백사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따금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젊은 연인들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굳이 남들의 시선에 좌지우지될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해변은 한가롭다 못해 쓸쓸해서 애초부터 남들의 시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갈매기들의 왁자지껄한 울음소리만 없었다면 침묵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날씨와 평일이라는 시간이 만든 해변은 가을의 쓸쓸함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배회하고 있었다. 해변을 찾는 사람이 워낙 뜸했던 날이라서 문을 연 가게들의 호객행위는 해변과 상반되게 뜨겁고 시끄러웠다. 팔짱을 낀 연인이 지나가면 빼꼬미 열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연인을 향한 손짓과 구애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가씨가 참말 예쁘네. 이리로 들어와요. 싸게 잘해드릴게. 다른데 가봐야 별거 없어요. 괜히 다리만 아프지...."
숙이네 집을 지나칠 때 시작된 호객행위는 김 씨네와 박 씨네 집을 지나고도 한참을 이어지다가 마침내 순이네 집을 끝으로 잠잠해졌다. 집집마다 놓여 있는 수족관엔 전국 팔도에서 잡힌 조개들도 모자라 중국이며 일본산 조개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잡아끄는 시선을 뿌리치고 빠져나오는 골목은 그래서 길고 부담스러웠다. 뒤통수가 따갑기 일쑤였고, 때로는 귀도 간지러웠다.
"저희는 호객행위를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을왕리 상인 연합회"라고 커다랗게 쓰인 입간판이 으름장을 놓아도 상인들의 손짓은 바쁘기만 했고,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다. 뜸해진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른 불편함이었다. 모처럼 바닷바람이나 쐴까 하던 마음에 한 바가지 찬물을 끼얹는 거여서 그나마 오던 손님을 내쫓는 꼴이었다. 배고프고 소주 한 잔이 그리운 사람은 알아서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들어갈 터였다. 두어 번의 발걸음을 했던 사람이라면 단골집도 생길 터였다. 불편해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것보다는 그게 훨씬 좋을 텐데도 불구하고 손짓 발짓이 바빴다. 아, 아니구나. 호객행위를 하지 않겠다던 상인회는 을왕동 상인회였었고, 호객행위에 비지땀을 쏟던 상인들은 을왕리 상인들이었다.
남자는 골목을 빠져나와 해변으로 가면서 중얼거렸다. "순이네, 숙이네, 은희네는 다 있는데 은경이네는 왜 없는 거야. 은경이네가 있었으면 단박에 들어가는 거였는데.... 그렇지 은경아?"
은경이를 보면서 남자는 싱겁게 웃고 있었다.
몇몇의 연인들이 추억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구는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듯 사진 찍기에 몰두했고, 멀찍이 떨어진 남녀는 모래밭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안 봐도 비디오라고
"래춘이는 은경이를 사랑해!" 라던가 아니면, 하트 하나 크게 그려놓고서 좌우에 서로의 이름을 쓸 터였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발그레 미소도 지을 게 뻔했다. 동서고금을 가릴 것도 없이 연인들의 애정행각은 거기서 거기였지만, 당사자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칠 만큼 심각하고 뜨거웠다. 모름지기 사랑이라면 그렇게 뜨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여름의 햇살처럼 이글대며 타올라야만 했고, 도가니의 쇳물처럼 펄펄 끓어야만 맞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옳고 그름도 없고, 맞고 틀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랑이란 이름을 내세우려면 쇳물처럼 뜨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넉을 빼앗겨야만 했고, 모든 걸 걸어야만 했다. 집안의 허락을 받을 수 없다면 옷가지 몇 벌 둘둘 말아 쥐고서 밤을 도와 줄행랑이라도 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도 몇 해를 못 가고 깨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시작부터 뜨거움이 없다면 어디에 쓸까? 차라리 하룻밤의 욕정을 찾는 게 빠르고 편할지도 몰랐다. 뜨뜻미지근한 마음이라면 차마 부끄러워서 사랑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였다. 적어도 젊음이라면 그만한 고통도 짊어지고 걸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아직 해를 넘기지 못한 새끼 갈매기가 모래톱에 서 있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아직은 추운 날씨도 그럴 계절도 아니었는데, 발 하나를 깃털 속에 감추고 위태롭게 한 발로 서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어미의 희고 뽀얀 깃털이 아닌 얼룩덜룩 갈색 깃털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봄에 부화한 햇병아리였다.
"벌써 발을 품속에 품어야 할 만큼 추운 거니? 벌써 그러면 모진 겨울은 어떻게 견딜래?"
바라봄이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일로 치부하고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동병상련이었다. 남이 들을까 부끄러웠지만 여름의 무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부터 남자는 시린 발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는 했다. 차가웠다. 구들장을 덥히다 만 냉골처럼 미적지근한 발이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며 냉기를 불렀다. 양말을 신지 않고는 방바닥을 걷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발바닥이 얼었다. 어떤 날에는 새벽에 자다 발이 시려서 깨고 말았다. 한 번 막혔던 혈관은 구석구석 따뜻한 피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석 달에 한 번 받는 정기검진에서는 아무 이상 없이 피가 잘 돌고 있다고, 이대로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했지만, 말초신경이 있는 끝까지는 피도 신경도 제대로 닿지를 못하는 게 분명했다. 결국 한 번 손상된 조직은 아직까지 살아나지 못했다는 말이었고, 손상된 조직은 온기를 품지 못해 초가을에 벌써 얼음을 얼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한참을 손으로 주무르고 어루만져도 한 번 차가워진 좀처럼 발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시린 발을 이불로 감싸고서도 한참이 지나야 겨우 미적지근 온기가 돌았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라 어디 밖에다 대고 입을 뗄 수도 없었다. 혼자 하는 가슴앓이였다. 가뜩이나 새벽잠이 달아나 쾡한 눈으로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잦았는데, 거기다 불면의 시간 하나를 보태고 있었다.
"벌써 수면양말이라도 신고 자야 하는 걸까?"
여름이 가까스로 한 풀 꺾인 게 고작인데 벌써 수면양말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남자는 실소를 지었다.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육십 청춘은 고사하고 겨우 쉰 중반에 상 늙은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새벽 양기가 없는 사람하고는 돈거래를 말라는 말이 있다. 언제 떠나가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란 말인데, 남자의 꼬락서니가 딱 그 짝이었다. 초가을이다. 열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덥다 더워를 연신 입에 달고 살 계절인데 남자는 수면양말을 떠올려야만 했다. 신을까? 말까? 이른 새벽에 깨어 별 거지 같은 고민으로 단잠을 쫓아버렸다. 그저 잠이나 쫓아내는 것으로 그친다면 별것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꼴이 하도 우스워서 별의별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아!"
자꾸만 밀려드는 씁쓸한 마음을 윗목으로 밀쳐내며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시린 발로 잠을 청하느니 차라리 혈액순환을 위해, 수면양말이라도 꺼내 신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될 듯도 싶었지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 마음이었다. 양말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양말을 신는다는 행위 자체가 자리를 보존하고 드러눕고야 마는, 단초가 될 것만 같은 불길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게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나마 근근이 붙잡고 사는 마음이었다.
부질없었다. 마음도, 말도 그랬다. 초점 잃은 시선이 먼 산을 바라보듯, 허망한 꿈들은 살얼음 위에서 쩍 쩍 위태로운 날들을 걷고 있었다. 외줄을 타듯 허방한 길이었다. 줄은 낡고 얇아서 언제고 툭 소리 내어 끊어지면 그만이었다.
"널 사랑해! 해바라기처럼 널 바라볼 수만 있어도 난 행복해. 정말이야!"
파도에 쓸려 이내 지워지고야 마는 말들이 허공 중에 부서졌다. 사랑의 말은 향기를 잃었고, 고백의 날들은 순간으로 지워질 터였다. 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몸뚱이도 순간순간 찢기고 부서졌다. 제 몸 하나 온전히 이겨내지도 못하면서, 무슨 꿈을 얘기하고 사랑을 떠들까. 담보되지 못하는 말은 시끄럽고 몸짓은 초라했다. 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되면 결국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야만 했다. 간절함이 얼마만큼 이 되었든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흩어지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말이 머리를 헤집으며 떠나지 않았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야무진 꿈도 있었고, 먼 훗날엔 뭘 하며 살아야지 하는 계획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진 것 하나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가장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때는 건강한 몸뚱이가 있다며 건강을 자신하던 때였다. 좀 늦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것만 같았다. 그래서 꿈꿨고 도전장을 내미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순간이었다. 오래된 것들을 하나씩 둘씩 내려놓는 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삶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십여 년쯤 뒤라도 좋고, 더 먼 어느 날의 그림이라도 좋을 꿈을 꾸었지만, 시린 발을 주무르는 새벽을 맞이했을 때, 도화지 위에 그림들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걸 보았다. 장담하지 못하는 세월이 푸른 물결로 넘실거리며 길을 막아섰다. 때가 되었는가? 꿈도, 사랑도 더는 품지 못하는가? 자문을 했다. 정말 그렇더라도 쉽게 신지 못하고 밀쳐낸 수면양말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가슴을 버선코 뒤집듯 뒤집어 비워낼 수도 없었다. 봄날 움트는 새싹이야 마른 줄기 밀어내며 새롭게 자란다지만 사람의 봄날은 그럴 수도 없었다. 놓지 못하는 세월이 켜켜이 쌓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만 시끄러웠다. 오뉴월 개구리가 떼로 울어도 공맹은 오간데 없고, 잠들지 못한 밤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개굴개굴.... 뽀가각 뽀각...."
남자의 시리고 저린 발이 개구리처럼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