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의자에 나란히 앉아 발장난을 치며 앉아 있다가 남자가 뭔가를 발견한 듯 말했다.
"순이야? 네가 가서 사진 좀 찍어줘!"
느닷없는 말에 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자다 말고 남의 다리를 긁냐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응? 뭐라는 거야. 뜬금없이 무슨 사진?"
순이의 말에 남자가 가리킨 곳엔 젊은 연인이 해바라기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카메라의 삼각대가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산책로의 울타리에 스마트폰을 기대 놓고서 찍을 요량이었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자꾸만 기대어 놓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어떻게 찍힐지 가늠해 보며 화면을 들여다봤다.
"자기야? 이 정도 각도면 제대로 나올까?"
"글쎄? 될 것도 같고.... 잘 모르겠는 걸. 일단 그냥 찍어봐야지 뭐"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고 여자는 다시 한번 어림짐작으로 스마트폰의 각도를 매만졌다.
"앞에 있는 제네들 말이야?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네가 가서 한 장 찍어줘"
"아, 난 또 뭐라고? 그러지 뭐"
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연인에게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젊음이 좋았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모습은 예뻤고 풋풋한 풀내음이 났다. 그네에 걸터앉아 순이와 연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남자는 웃고 있었다.
"어디 내가 한 장 찍어줄까요? 같이 찍으려는 거 같은데...."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쪼르르 남자 옆에 섰다. 틀에 박힌 장면이었다. 활짝 핀 해바라기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남녀는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얌전히 서 있었다. 어깨동무를 한다거나 손이라도 꼭 잡았으면 더 예쁘겠다 생각하고 있을 때
"근데요. 저희 안고 찍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자기야? 있잖아. 내 무릎을 이렇게 들어 올려. 알았지?"
말을 건네자마자 여자는 포즈를 요목조목 설명하더니만 남자의 목덜미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순이의 동의는 이미 필요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남길 수 있을까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디선가 보고서 나중에 나도 꼭 한 번 찍어봐야지 하는 포즈였다. 그래, 뭐 어때? 젊음의 특권 같은 모습이었다. 남들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고 세월에 늙다 보면 하고 싶어도 체력이 안 돼서 못한단다. 청춘영화의 포스터 에서나 볼 법한 모습에 남자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야? 좀 무겁더라도 조금만 힘내! 파이팅! 호호호"
조금은 쑥스러웠는지 남자는 발그레 얼굴을 붉혔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귀여웠다. 그렇게 정지화면처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적극적인 여자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많이 표현하고 많이 사랑하는 게 좋았다. 게다가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이고 젊음이지 않은가.
젊은 여자의 목소리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남자도 덩달아 '힘내! 파이팅!' 목소리를 높여 응원했다. 가로변 작은 공원에 때 아닌 웃음꽃이 만발했다. 순이는 그렇게 연거푸 몇 장의 사진을 찍었고, 젊은 연인은 넘겨받은 스마트폰의 사진을 확인하고는, 만족한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떴다.
"참 예쁘다. 그렇지? 응?"
"응, 그러네. 당돌하다 싶게 부끄럼도 없고 정말 예뻐."
자리로 돌아온 순이와 남자가 방금 떠난 연인을 보며 웃고 있었다. 부끄러울 것도 없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 청춘의 풋풋함은 오히려 당돌해서 예뻤다. '우린 요렇게 예쁘게 사랑해요!' 대놓고 하는 자랑이라서 미소 짓게 했다. 활짝 핀 해바라기 꽃 무더기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청바지에 받쳐 입은 하얀 티셔츠가 말간 햇살처럼 고왔다. 꾸밈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과한 분칠이었다. 하늘을 닮은 청바지에 빨랫줄에서 뽀송하게 마른 하얀 티셔츠가 한 장의 추억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젊음은 그래서 더욱 예뻤다.
"우리도 그만 일어날까?"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순이가 말했다. 그런 순이의 손목을 잡아끌며 남자가 말했다.
"싫어! 앉아 봐.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시간이 늦은 것도 아니고. 강바람이 이렇게 좋은 걸"
남자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별것도 아닌 말이지만 수다도 더 떨고 싶었다. 집에 가봐야 누구나 다 한 마리쯤은 있다는 금송아지도 없었고, 그 흔한 꿀단지도 없는 방엔 입 한 번 벙긋 못할 외로움만 성난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 지금 골방에 들어가기 싫구나?"
"응, 가봐야 뭐 딱히 할 것도 없고.... 너랑 이렇게 있는 게 제일 좋기도 하고.... 방금 네가 말한 것처럼 골방은 답답하기나 하지 뭐 "
사실이 그랬다. 매일 쏟아내는 글들은 몇 섬의 무게로 다가왔지만, 정작 종일 있어봐야 거울을 보며 치는 고스톱일 뿐이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치겠냐고 하지만 밥술이야 어떻게 뜬다고 해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건 동아줄 같은 거미줄이 치렁치렁 매달리는 거였다.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물과 기름 같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오래도록 지속될 관계여서 될 수 있으면 친하자고 마음을 먹어도 강요된 침묵은 고문이었다. 두 개나 달린 귀는 뻘쭘하고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오래 붙잡지 않을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응?"
어느새 남자의 말은 애원조로 바뀌었다.
"그래, 알았어. 그렇지만 잠시만이야. 호호호"
남자를 째려보며 여자가 웃었다. 여자의 눈길은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는 것만 같았다. 아이라고 해도 좋았다. 잡은 손은 따뜻했고, 바람결에 전해지는 그녀의 냄새는 향긋했다.
"딴 소리 말고 집에 들어가서 글이나 열심히 쓰세요. 요즘 캘리며 사진이 정말 좋더라.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마음에 들어"
"그래야지 뭐. 알았어. 그만 재촉하세요. 더는 붙잡지 않을 테니까."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그만 일어나자 그녀가 말을 했다. 남자도 더는 붙잡을 수가 없어서 일어났지만 엉덩이는 무겁고, 발바닥은 땅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헤어질 때는 늘 그랬다. 아쉽지 않은 이별은 없었다. 영원한 이별도 아닌데 늘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고개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십 리도 못 가서 발 병 난다'던 말이야 애증이 섞인 저주의 말이었지만,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아쉬움은 없던 병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겨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달래며 집에 돌아온 남자가 조금 전에 보았던 젊은 연인을 떠올리며 싱겁게 웃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노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네의자에 앉아 바람결에 흔들리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면, 붉게 물드는 노을로 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청춘의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다다른 시간에 마침내 초록도 벗고, 파랑도 덜어내고서 남은 붉거나 노란 햇살만 휘휘 몸에 감고서, 바람에 흔들리는 노을이 작은 의자에 물들었겠다 싶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엔 노을처럼 노란 물감이라도 몇 방울 남겼을까? 하얀 옷에 해바라기처럼 진한 노랑을 물들일 수 있을까 하는 싱거운 생각이 스쳤다. 그랬으면 좋겠다. 비를 몰고 오는 잿빛 하늘보다야 노랑으로 물든 하늘이 곱고 예쁠 터였다. 누군가의 바라봄이 있다면 그의 눈동자 가득 노랗거나 붉은 물감으로 물들면 좋겠다 싶었다. 양지바른 비탈에 피는 진달래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같은 진달래꽃도 햇볕 맘껏 받으며 피는 진달래는 연분홍 고운 꽃잎도 더 짙고 예뻤다. 응달에 핀 꽃은 바람에 몇 번이고 씻기고 남은 분홍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초라하다 말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빛바랜 꽃잎은 아무래도 안쓰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곱고 짙은 진달래꽃으로 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울컥 눈물짓게 하는 노을로 물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가끔 듣게 되는 잔소리가 있었다. 잔소리가 맞을까? 잔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야단치는 말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네 글은 너무 우울해. 그래서 안 돼. 새끼야?"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왕이면 조금 밝았으면 좋겠어. 얌전하게 타이르는 말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런 거였다. 읽기에 부담스럽다거나 지켜보는 마음이 안 좋다는 말이다. 기껏 들어와서 읽어주시게나 초대를 해 놓고서, 이제 와서 오리발 하나 떡하니 내밀고야 마는, 남자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떠들기를 좋아하고 글씨 하나 쓰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읽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글을 쓰면 더욱 좋을 터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고슬고슬 입맛에 맞게 밥을 할 줄을 모른다. 물을 맞추지 못해 고두밥을 만들기 일쑤고, 너무 질어 '차라리 죽을 먹지!' 할 수도 있다. 찌개는 멀건 국으로 낯짝을 바꿨고, 무쳐낸 나물은 틈만 나면 밭으로 달아날 궁리에 몰두했다. 깡통에 들었던 꽁치란 놈은 언제 꽁무니를 내뺐는지 알 수도 없었다. 입맛에 맞는 밥상을 차릴 재주가 있었다면 벌써 큰 식당이라도 하나 꿰차고 있을 그였지만, 남자는 소태 국에다 반쯤 탄 밥을 차려낼 재주 밖에는 없었다.
소반에 차려낸 밥상이 부끄러웠다.
"차린 건 없지만 성의로 알고 드시어요!"
짐짓 모른 체 상을 들이밀기엔 어쩐지 겸연쩍었고 미안했다. 내민 손을 슬며시 소매 속으로 숨기는 마음이었다.
"정말 차린 게 없군요?"
정색을 하며 말을 받으면 그때는 정말 어쩔 것인가? 꾸밀 수가 없었다. 음식은 손맛이라고 투박하고 거친 남자의 손으로 빚은 맛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남들의 말처럼 우울한 잿빛 하늘이 전부일 수도 있었다. 허위허위 올라선 쉰다섯 해의 산마루엔 조물조물 맛깔스럽게 차린 밥상이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남자의 입맛에 맞게 차려낸 밥상이었다. 요리조리 뜯어보고 맛을 봤지만 남자의 입에는 맛깔스러웠다. 미안하고 송구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입맛을 바꾸시는 게 차라리 더 빠를 듯합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오늘도 남자는 정성을 담은 밥상을 내밀고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성의로 알고 맛있게 드시지요!"
청하는 말은 오늘따라 유난히 노을처럼 곱고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