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산다는 건 인공의 시간이 아닌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게 된다는 말이기도 해. 한낮의 햇살이 기승을 부리며 굵은 땀방울을 쏟게 만들 때, 벌써 잠자리 몇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어.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야. 희뿌옇게 동이 트기도 전에 서둘러 농부들은 삽이며 호미를 찾아들고는 논으로 향하고 밭두렁을 걸었지. 찜통더위를 피해 일손을 서두르려는 거야. 정수리에 이글거리는 해를 이고 일을 한다는 건 미련한 일이었고, 더위를 먹을 수밖에는 없었거든. 점심때가 되기 전까지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는, 한낮이 되면 늘어지게 낮잠 한 숨을 자야만 했어. 평상이며 대청마루에 옷섶을 풀어헤치고 누우면 누가 엎어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어. 여름은 그렇게 고단했고, 몸은 파김치가 되도록 지치고야 마는 시간이었지. 그럴 때면 귀청 따갑게 매미가 울었어. 어찌나 목청이 컸는지 몰라. 기껏해야 손가락 두 마디밖에는 안 되는 조그만 녀석들인데 동네가 떠나가라 울고는 했지. 고놈들도 다 짝을 짓고 알을 낳으려고 혈안이 되는 걸 보면 사람이나 풀벌레나 다를 게 없더라고. 다 때가 되면 짝을 찾아 사랑을 하게 되는 걸 보면 자연의 섭리란 참 대단하고, 시비스럽다 싶어. 그렇게 여름이 요란을 떨다가 마침내 기세가 한풀 꺾일 때쯤이면 메밀 잠자리가 나타나 게으른 농부를 채근할 터야. 소나기가 한 차례 시원하게 내리고 나면 선선해진 하늘에 어김없이 덩치 큰 잠자리가 날아다녔지. 고 녀석이 메밀 잠자리야. 모르겠어. 그게 녀석의 바른 이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렀지. 예전부터 그렇게 대를 이어 불렀으니까 못해도 사투리 정도는 될 거 같아. 잡초 무성한 묵밭에 설렁설렁 낫질을 하고, 메밀 씨를 훌훌 뿌리면 그것으로 메밀 농사는 전부였지. 그만큼 손이 안 가는 농사가 메밀이었어. 야들야들 보드라운 메밀묵을 어미는 정말 좋아하셨어. 떼 지어 하늘을 맴도는 메밀 잠자리며, 달밤에 소금을 흩뿌린 듯 메밀꽃이 피면 어미가 떠올라.
잠자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계절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어.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뻔한 거 아니겠어. 보잘것없는 잠자리도 온몸으로 계절을 표현하며 살아서 그래. 어쩜 그렇게 귀신 같이 때를 알고 나타나는지 몰라. 잠자리도 다 같은 잠자리가 아니라서 철마다 얼굴을 내미는 놈들이 다 다르거든. 그래서 잠자리만 유심히 지켜보면 얼추 때를 짐작할 수 있는 거야. 가을이면 빨간 고추잠자리가 떼 지어 나타나. 마치 단풍이라도 들 듯이. 풀벌레라도 표현하는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따라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싶으면 망설이지 말고 따라 해야 심사가 편하고, 잠자리가 편해지는 거야. 가시방석 같은 요를 깔고 자느니 눈치를 키워 봐.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먹는다고 하잖아.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다가 때때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돼. 살아 있으니 당연한 질문이겠지. 하루 삼시 세 끼를 꼬박 챙겨 먹는다고 해서 ‘나는 밥으로 살아!’ 하고 대답을 하지는 않을 거야. 사람이 살려면 당연히 밥을 먹든, 아니면 고기를 먹든, 위장을 채워줘야 에너지를 얻게 되고, 결국 그 힘으로 살게 마련이지만 그런 말이 있잖아.
“에라, 인간아. 넌 밥만 먹고 사니? 밥만 먹고살아?”
앙칼진 마누라의 잔소리에 잔뜩 주눅 들어 방바닥만 긁고 있는 사내는 정말 밥만 먹고살아서 욕을 먹는 거겠지, 밥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올법한 직무유기에, 관리 태만 이런 등등의 죄를 짓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랑스러운 아내의 입에서 서릿발 서걱대는 북풍한설이 몰아칠 수밖에 없겠지. 자업자득 직무유기요, 관리 태만이 가져다준 당연한 질책이라고 생각해야 해. 가자미눈을 하고서 식은 밥 한 덩이를 툭하고 던져주는 식으로 밥상을 받는다면 심각하게 생각을 해봐야 해. ‘뭔가 문제가 있구나. 그것도 아주 심각하고 곪아 터진 뭔가가 있구나!’하고 고민을 해야만 하는 거야. 마치 세상의 종말이 코앞에 왔다 싶은 심정으로 고민을 해야 하는 거야. 고민과 반성을 해도 모자랄 판에, 거기다 대고 버럭 화를 낸다면 아, 그 미련하고 참담한 존재라니.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어. 고집불통에 미련 맞고 게다가 눈치라곤 약으로 쓰려고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인사인 거겠지.
뭐가 다르겠어. 목줄 단단하게 차고서 하루 종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개와 뭐가 다른지 나는 알지를 못해. 다른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으면 귀띔을 해줘. 내가 알지 못하는 심오하고 거창한 그래서 마침내, 대세를 거슬러 인류 공영의 새로운 지평을 열 그 이유를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아시아 대륙으로 삶의 근거지를 확장했듯이, 고개 숙인 남자들에겐 분명 신대륙의 발견만큼이나 위대한 일이 되겠지. 그러니까 혼자만 알고 있기엔 그 이유가 너무나 소중한 인류, 그것도 수컷들의 공동자산인 거야.
만일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치고, ‘넌 무엇으로 사니?’하고 물으면 대답하겠지.
“밥을 먹고살아요. 거기에 더해 주인님의 사랑스러운 눈길과 손길이 있으면 더욱 행복하지요”
분명 개도 그렇게 말을 할 거야. 밥을 먹고 산다고 대답을 하겠지만, 밥만으로 행복하다 말하지는 않을 게 틀림없어. 말도 못 하는 개도 그래. 주인의 따뜻한 보살핌에 어쩌면 엄지발가락을 치켜세울 거야. 밥만으론 충족되지 않는 무엇이 개에게도 존재한다는 말이야. 사람이라면, 그것도 식은 밥덩이 던져주는 그라면 얘기해봐야 입만 아프지 않겠어. 잡힌 물고기라고 해서 방치해도 된다거나, 더 나아가 떡밥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그 주둥이에 재갈을 물려도 할 말이 없어야 이성을 가진 사람의 도리라고 봐. 오히려 더 많은 관심과 양질의 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야. 자유롭게 유영할 권리를 빼앗아놓고, 오히려 데면데면한다면 말이 안 되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주둥이와 입의 차이점은 알 거라 믿어. 혹여 모를까 싶어 설명을 덧붙인다면, 짐승의 입은 주둥이라 말을 하고, 보통 사람의 입은 주둥이라 표현하지 않아. 그러니까 멀쩡한 입을 주둥이로 만들지는 말아야 사람인 거야.
가끔 늙수그레한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렇게 말을 하곤 해.
“고생한 거야 알죠. 물론 사랑도 해요. 어디 그걸 꼭 말로 해야만 아나요? 이심전심 말을 안 해도 알아야 그게 사랑이죠. 안 그래요?”
안 그래요. 알 수가 없어요. 말을 않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물론 대충 그러려니 하는 짐작을 할 뿐. 궁예가 되살아나 관심법을 전수한 것도 아닌데 사람의 마음을 어찌 들여다볼 수가 있겠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을 못 하겠다고 사내는 말을 하고, 잔뜩 홍조 띤 낯빛으로 한쪽에선 평생의 소원이 ‘사랑해 여보!’하는 소릴 듣는 거라고 얼굴을 붉히는 거야.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는데 곁에서 옆구리 찌르는 사람의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한다고 하면 너무 슬픈 일인 거야. 물론 자랄 때 기껏 봤다는 게 면박이나 주고, 밥상머리에 앉아 반찬 타령이나 하는 걸 봤을 터여서 그나마 이해를 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건 아닌 거야. 뭐가 창피하고 부끄러운지. 무엇이 유치하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발가벗고 춤을 춘다 한들 부끄러울 이유가 어디 있겠어? 오히려 한바탕 웃을 수 있다면 열 번이라도 발가벗고 엉덩이 춤을 출 거야. 가장 은밀하고 대담해도 좋을 둘인데, 아껴두었다가 죽으면 관 짝에 넣고 가려는지 몰라도, 표현에 왜 그리 인색한지 이해할 수가 없어. 물론, 살아온 시대가 지퍼를 채우듯 입을 꾹 다물고 사는 게 미덕이라 포장을 했어도 마찬가지야.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 미물인 매미도 목이 쉬도록 울어.
"보시어요? 저 여기 있어요. 그러니 어서 날 보시어요!"
어디 매미만 그런 것도 아니야. 잠자리란 녀석도 상대의 눈에 들려고 구애의 비행을 한다고 하잖아. 암컷의 주변을 맴돌며 곡예비행을 선보이며 사랑을 구한다는데, 입도 있고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 데도....”
흥얼흥얼 콧노래로 즐거울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겠지. ‘어디서 좀 노셨군요?’하는 추임새를 꼭 노래방에서나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거야.
음치면 어떻고 박치면 또 어때. 아무리 노래가 엉망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는 그것만으로도 가장 달달한 사랑노래일 거야. 영화에 나오는 그 어떤 로맨틱한 세레나데보다도 더 황홀한 사랑의 고백일 게 분명해. 듣는 사람은 또 어떻겠어.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아니라고 타박을 할까? 아니면 ‘어쩌면 당신은 그렇게 노래를 못해?’ 구박하고 면박을 주겠어? 입 꼬리는 이미 귀에 걸릴 듯 치켜 올라가고, 심장은 다듬이질하듯 콩닥거릴 거야. 긴 생머리 나풀거리며 한껏 멋을 부린 청춘의 그녀로 되돌아갈지도 모르겠어. ‘어머머, 너무 멋져요. 자기는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몰라...’ 가슴을 파고들며 아양을 떨지도 모르겠어. 아침에 일어나려 알람을 맞추듯 머릿속에 그를 위한 사랑의 말 한 구절 알람처럼 맞춰놓는 거야. 그리고는 아침이면 달달한 벨소리로 그를 깨우는 거지.
“잘 잤어? 오늘은 하늘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꼭 당신처럼 예뻐!”
처음엔 얼굴은 화끈거리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힐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쥐구멍이라도 찾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식은 죽 먹기처럼 수월해질 게 분명해. 거기다 홍당무처럼 얼굴 붉히면서 함박웃음을 지을 그녀를 보게 된다면 용기백배 뽀빠이를 만나게 될 거야.
“어머, 당신도 참 주책이야. 아침부터 부끄럽게...”
그렇게 아침을 열면 아마도 상다리는 두어 달을 못 버티고 부러지고 말 거야. 일식 삼 찬이야 젊은 군인들한테 던져버려도 좋아. 말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게 꼭 천 냥의 빚을 갚는 것만 있는 건 아닐 터야. 덩달아 상을 파는 장사치는 또 벌이가 좋다고 그의 부인에게 대접을 받을 터여서, 완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니 얼마나 좋아.
가끔 듣는 소리가 있어. 내 글을 읽던 친구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늘 읽게 되는 글의 대부분이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이해를 못 할 것도 없지만 내게도 나름 항변의 말이 없는 것도 아니야.
"너는 다 늙어서 무슨 놈의 사랑타령을 밤낮으로 그렇게 하냐? 시종일관 지겹지도 않니?"
"아니? 난 하나도 지겹지 않아. 오히려 고백의 말들이 그만 마를까 싶어서 걱정인 걸. 날마다 사랑의 말들이 화수분으로 솟아났으면 하는 게 내 소원 중 하나라네."
친구에게 면박을 받기도 한다만 사랑타령은 멈출 수가 없었고, 멈추고 싶다는 생각은 애초에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어. 문지방을 넘어 설 힘이 있거나, 숟가락을 들 기운만 있어도 곁눈질을 한다는 남자라서 사랑타령을 하는 것만은 아니야. 뭐랄까? 내게 사랑은 꿈을 부르는 꽃이기도 하고, 주문처럼 외게 되는 말인 거야. 향기에 이끌려 벌 나비 날아들 듯 사랑타령을 하는 심장엔 꿈꾸는 내가 있어. 깊은 동면에 빠졌던 꿈 한 자락이 봄날 움트는 새싹처럼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거야. 단잠을 자고 일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종일 되돌이표가 찍힌 노래 한 구절을 옹알거리듯, 잠에서 깨고부터 잠들 때까지 추임새를 붙여가며 부르게 되는 노래가 사랑이야. 그러잖아? 사랑은 숨길 수도, 막을 수도 없어서 재채기와도 같다고 말을 하잖아. 꿈이란 녀석도 그런 것 같아. 봄볕에 고개를 드는 들꽃처럼 ‘나 당신 사랑해’하는 말 한마디에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말아. 마법과도 같은 말이고 그런 힘이 깃든 말이다 싶어. 무엇에 기인한 자신감 인지도 모를 당당함이 스며들어서 떡잎을 피우고 가지를 치는 거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내게 사랑은 잠들지 않는 꿈을 꾸게 하는 칭찬의 말이고 햇살이야.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노래를 부르듯 그대 사랑하는 난 '꿈꾸는 사람'인 거지.
“있잖아? 나, 너를 사랑하나 봐”
오늘도 붓을 들어 너에게 사랑고백을 해. 끝나지 않을 꿈이고,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할 꿈을 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