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기억에만 담기엔 버거워서 일기를 쓸까 생각을 했어. 아무리 꾹꾹 눌러 담은 기억도 세월 앞에선 무기력해지기 마련이어서 푸석푸석 바람이 들고 엉뚱 모양으로 뒤엉킬 수도 있겠다 싶었어. 순간순간을 다 쓸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아야 할 이유도 없을지도 모르겠어. 다만, 그런 거 있잖아. 하루를 보내며 펜을 들었을 때 이런 마음이었구나 하는 감정 정도는 기록하고 싶은 거. 요즘 부쩍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서 마음먹었을 때, 흐지부지해지기 전에 시작해야지 다짐을 하듯 자리에 앉았지 뭐.
벌써 이틀이나 지난 시간이 됐네. 새벽부터 찌푸렸던 하늘이 이른 점심때쯤 되었을까 비를 쏟기 시작했지. 멀리 서는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거렸어. 요란하게 몰려가는 비는 어찌나 우쭐대던지 '허허 참 고놈 봐라' 창가에 기대 비 구경을 하다가 우쭐대는 비에 웃음이 다 나오라고.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네게서 문자가 날아들었어.
"오빠? 거기도 비 오지? 여긴 얼마나 쏟아지는 몰라. 비 오니까 좋다. 그렇지~~ㅎ 응? 응?"
그렇지 않아도 싱숭생숭 들뜬 마음은 네가 보고 싶어서 죽겠는데, 그래도 겨우 참고 억누르던 마음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어.
네가 그렇게 되묻지 않아도 마음은 몽글몽글 무장해제되고 벌써 흰 손수건 꺼내 항복을 알리고 있는 걸. 난 이미 너에 포로고, 비의 포로야.
가뜩이나 보고 싶어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태풍이 분다고 길을 마다할까? 달려가 볼 수만 있다면 이미 자동차의 열쇠를 찾을 터였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달력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서 몇 밤 남았나 손꼽는 아이였다. 비가 내리면 안 되는데 조바심으로 밤을 기웃거리던 꼬마가 웅그리고 달아나서 머릿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다림은 지루하고, 그리움은 애가 탔다.
"순이야? 이렇게 비 내리니까 네가 더 보고 싶어. 같이 커피도 마시고 싶고.... 근데 기다려야 하니까 겨우 참는 거야. 아, 뽀뽀도 하고 싶어 ㅎㅎ"
"이그~~ㅎ 오빠? 나도 일이 손에 안 잡혀"
그가 있는 곳에도 비가 내렸고 그를 생각하는 내게도 비가 내렸다. 거기나 여기나, 촉촉이 젖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 생각을 했어.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데 마음에선 타닥타닥 불꽃이 일더라고. 하얀 연기 풀썩풀썩 머리를 풀어헤쳐 가슴 가득 채우더니 또르르 눈물방울도 맺히게 하고 말이야.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청춘은 오간데 없고 노을처럼 세월이 쌓인 몸뚱이에도 이렇게 불꽃이 타는구나'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 요즘 머리에 꽃 한 송이 꽂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기분이야. 잠도 달아나고, 입맛도 달아나고, 생각도 달아나서 머릿속은 온통 네 생각만 가득해. 눈을 감아도 너의 얼굴만 동동 떠다녀. 아, 어쩜 좋니? 천둥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건 하늘만 그런 게 아니야. 내 마음에도 네가 가득 들어와 요란을 떨고 있거든.
그가 보낸 글 한 줄 마음에 담듯 사진에 새겨 넣고서 백 년을 가두어 기억하려고 해. 심장 쿵하고 내려앉던 날에 장대비가 내렸고, 마음은 흥건히 순이 너로 젖었어. 미치게 보고 싶은 날에는 비가 내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