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선 풀냄새가 나

by 이봄


마른 숫돌에 잔뜩 물을 먹이고는 불긋불긋 녹이 슨 낫을 가져다가 서걱서걱 날을 세우면 제 몸 깎인 숫돌은 숫돌 물 걸쭉하게 쏟아냈어. 부지런한 농부야 늘 새벽을 깨워 논으로 나가는 탓에 잠도 덜 깬 몸뚱이 서걱거리며 내어줘야만 했던, 숫돌이란 놈의 팔자도 보통 사나운 게 아니야.

시퍼렇게 날을 세운 낫을 들고는 꼬불꼬불 이어진 꼬부랑 고개를 넘듯 잡초 무성한 논둑을 휘휘 둘러봤어. 절로 한숨을 배 뱉고야 말았지. 여름 장마를 반기는 놈들은 잡초들 밖에는 없을 거야. 그렇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꾸역꾸역 몸집을 키우는데야 어쩌겠어. 징그럽게도 질긴 생명력은 쇠심줄 저리 가라였지. 녀석들 하는 꼴을 '에라 모르겠다' 나자빠지면, 자고 나면 한 뼘씩 웃자라서 어디가 논이고 어디가 덤불인지 구별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 풀과의 전쟁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던 거지. 깎으면 자라고 멀끔하게 깎았다 싶어 돌아보면 벌써 저만큼 좇아오는, 술래잡기 같다고나 할까.


피워 물었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서걱서걱 풀들을 깎았어. 이웃집 더벅머리 총각 머리를 밀듯, 아예 뿌리를 뽑듯이 바짝 틀어쥐고는 최대한 바싹 깎아내고 있었어. 한참을 그렇게 씩씩대면 눈을 뜰 수도 없게 땀이 쏟아졌어. 등골이며 인중이며 조금이라도 주름진 길을 따라 도랑물처럼 땀이 흐르면 어쩐지 짭조름 갯내음이 났어. 첩첩산중에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라치면 허허 웃게 되더라고. 어처구니가 없잖아. 그저 웃어야지 뭐 그렇다고 식전 댓바람부터 엉엉 울기도 그렇잖아. 땀을 훔치며 피워 문 담배는 꿀맛이었어. 휴~~ 내뱉는 연기엔 올망졸망 땀방울이 진득하니 매달렸던 거 같아. 세상 시름이 다 연기처럼 흩어졌어. 훤하게 드러난 논두렁도 예뻤지. 아, 그때 맡았던 냄새도 평생을 담고 사는 기억이야. 무슨 냄새냐 하면 방금 베어낸 풀들이 쏟아내는 냄새였는데, 냄새라고 말하기엔 어째 미안한 그런 거였어. 향기라고 해야 맞겠다 싶기도 해. 상큼하고, 싱그럽고, 풋풋하고, 신선하고 또 뭐가 있을까? 말로는 설명을 못할 향기였어. 어쭙잖은 말을 가져다 붙이기가 좀 그래.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추켜올리게 되는 풀냄새야.

그런 거 모르겠구나. 비 그친 냇가에 한껏 단장한 풀들이 바람처럼 하늘거리면 어찌나 부드러웠나 몰라. 손등에 스치는 촉감이 말도 못 하게 부드러웠어. 식욕을 부르는 초록이었고 촉감이었어'라고 말하면 넌 배를 잡고 웃을 테지만 정말 그래. 지게 가득 풀을 베어다가 작두로 숭덩숭덩 잘라서는 한 삼태기 가득 구유에 부어주면 우리 집 누렁이는 침을 뚝뚝 흘리면서 긴 혓바닥을 내밀었어. 그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말이야. 오드득 오드득 씹는 소리는 또 얼마나 좋던지. 나도 한입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 거 같아. 누렁이의 코를 벌름거리게 했던 풀냄새가 논두렁에 불던 갯바람일지도 모르겠어. 잊히지 않는 기억과 그 속에 여전히 싱그러운 냄새가 풀냄새야. 도둑 담배 한 모금에 뒤섞인 냄새가 어찌나 좋은지....


"호호호 아니에요"

말보다도 더 많은 웃음이 섞인 너와의 대화 끝에는 방금 베어낸 논두렁의 풀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어. 짭조름한 갯바람으로 간을 하고 상큼한 드레싱 소스 휘휘 둘러낸 샐러드를 받아 든 기분이야. 그냥 미소만 잔뜩 머금고는 코만 벌름거리고야 말아. 도시의 번잡함에 묻혀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 고개를 쳐들고 나를 그 시절로 잡아끌더라고. 찔레꽃 향긋하게 피고 아까시꽃 눈처럼 내리던 날에, 까까머리 소년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던 신바람! 신바람이 불었어. 그것도 누렁이 오득 오득 군침을 흘리던 풀냄새 가득 싣고서 신바람이 불었던 거야. 테이블보 바람에 살랑거리고 예쁜 꽃 한 송이가 장식된 식탁엔 새콤 향긋한 샐러드 한 접시 꽃처럼 앉았지. 너랑 나 그저 바라보며 미소 짓는 시간에 풀냄새가 나. 도란도란 호호호 향긋하게 뒤섞인 말들이 어찌나 곱던지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야. 어쩜 좋니? 네게 선 풀냄새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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