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고 쌓기를 반복했던 말들은 해 저무는 서산을 이루고도 남을 터인데, 막상 붓을 들고는 쓸 말이 없다. 주절주절 청포도 알을 키우듯 마음에 매달린 놈들도 여름 땡볕에 살을 찌웠을 텐데도 막상 꺼내 보이려 하면 꽁지 빠지게 달아나기 바쁘다. 뭐가 부끄럽고 쑥스러울까? 멋모르고 앞에 섰던 놈은 화들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른다. 펼친 책 뒤에 숨어 졸던 녀석이
"선상님? 지는 아니라예~~!"
깜짝 놀라 뜬금포를 날리던 민망함이 이러할까? 썼다 지우고 머리도 한 번 긁적이게 되는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움에 시간은 더디고 읽던 책은 도통 재미가 없다. 하얀 종이에 까만 개미들 앞 서거니 뒤 서거니 길을 걷다가 떨어진 빵조각 하나에 우르르 뒤엉키고야 만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먼지 풀석이는 책장을 덮고 우두커니 거울 앞에 앉았다. 꼴이 우습다. 빨간 코의 어릿광대가 앉아 웃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기댄 안경이 삐딱하다. 그렇지만 굳이 고쳐 쓸 마음도 없었다. 포대기 꺼내다가 어화둥둥 구들장이라도 업어주면 그만인 날이다. 하릴없는 섬 고양이 돌담 위에서 졸 듯이 덩달아 졸아도 좋은 시간이었다. 다만, 보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오빠? 저 없다고 시무룩해서 밥도 거르고 기운 빠져 있으면 안 돼요. 알았죠? 예쁜 꽃도 찍고 동네 산책도 빼먹지 말고..."
또랑또랑 맑은 물 흐르듯 그가 당부를 했고, 나는 그러마 약속도 했다. 약속처럼 동네도 두어 바퀴 어슬렁거렸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 있는 편의점은 며칠 시끄럽게 뚝딱대더니만 확장 개업을 했다. 배로 늘어난 편의점의 반쪽은 가정식 백반을 팔던 밥집이었다. 돌려 말하자면 백반집은 망해 문을 닫았다는 얘기다. 야외 테라스가 번듯한 편의점 하나가 생겼으니 반길 일이었지만 어째 입맛이 씁쓸했다. 인상 좋게 웃어주던 밥집 아주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차 문 여닫는 소리에다 아이들 보채는 소리가 더해져 왁자지껄 요란하다. 옆집 젊은 부부가 캠핑이라도 가려는 모양이다. 뻘건 고추장 듬뿍 찍은 청양고추가 어지간히 매웠지만 부러 우적우적 씹어 밥을 먹었다.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입에 서는 화닥 화닥 장작불이 탔다. 아직도 용필이 형아는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나나 궁금했다. 여름이면 푸른 언덕과 짙푸른 바다가 손짓을 한다고 줄곧 부르짖던 용필이 형아의 꾐에 빠져 배낭을 샀었다. 아, 젠장! 휴일은 이래서 싫었다. 방콕을 하면 어째 딱지 한 장이 날아들 것만 같은 이 찝찝한 마음이 싫었다. 너도 없는 이틀은 그래서 길고 길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두 말하면 입만 아플 뿐이고. 결국 난 종이에 고작 이 말 하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