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씽씽

by 이봄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 무렵 평상에 배를 깔고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에선 달그락달그락 밥 짓는 소리가 정겨웠고, 초여름의 산바람은 산들산들 시원하기만 했다. 그때 오토바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더니만 대문 앞에서 멈췄다. 아, 그때부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가슴은 어찌나 벌렁거리는지 정신이 혼미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 하나에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며칠 전 계집애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이라도 온 것일까? 찰나의 기다림이었지만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고, 대문에서 마당에 이르는 길이 십 리는 되는 듯했다. 온통 생각이 거기에 머물자 나도 모르게 시선은 길가로 난 대문에 꽂혔다. 짐작은 어긋나지 않았다. 누런 가죽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가 빙긋 웃으며 나를 찾더니만

"래춘이가 연애를 하나 보네? 예쁜 아가씨가 편지를 다 보내고 말이야. 옛다 여기.... 하하하" 불쑥 내민 손에는 예쁜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허둥대고 있을 때 웃음을 남기고 우체부 아저씨는 떠났고, 편지를 받아 든 나는 돌처럼 굳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뭇거뭇 여물지 않은 수염이 꼴에 사내를 흉내 낼 무렵이었다.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갑작스럽게 변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늘었고 멍하니 먼산을 응시하는 버릇도 생겼다. 가만가만 들길을 걸었고,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웃었다. 얼빠진 놈이 따로 없었다. 어둠 속에 숨어 야릇한 상상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날도 늘어났다. 가끔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도리질을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얼굴 붉혀가며 계집애를 마음에 담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고, 교정에서 마주치면 남의눈을 피해 가며 몰래 미소 짓는 게 고작이었지만 세상을 전부 얻은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남들이 모르는 둘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짜릿함이 좋았고, 가뭄에 콩 나듯 주고받는 편지 한 통이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집애도 지금 저 별을 바라보고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계집애도 내 생각을 하면서 저 별을 보고 있을 거야. 부푼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라 하늘을 날고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마음은 하늘을 날았고 수면에 스치듯 바다를 건넜다. 상상 속에서는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부끄러워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어찌나 조리 있게 떠들었는지 수다스럽다 흉을 볼까 싶어서 걱정이 앞섰다. 커다란 계집애의 눈이 하도 예뻐서 눈싸움이라도 하듯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다. 상상은 상상이었고 현실에서야 여전히 수줍어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달 밝은 밤에 꽃마당 가득 꽃이 피었다. 하얗게 내린 달빛처럼 꽃은 희고 탐스러웠다. 까만 밤의 장막에 점점이 박힌 별처럼 빛났다. 담장에 갇힌 향기는 정신이 아득하게 짙었고 향기로웠다. 까만 밤과 하얀 꽃이 너무도 이질적이기도 했고, 반대로 더없이 조화롭다고 생각했다. 우물가 넓은 화단을 가득 차지하고 자라던 백합이 커다란 꽃송이를 매달고 있더니만, 휘영청 달빛이 고운 밤에 꽃을 피웠다. 손에 꼽을 수 없이 떼로 피어난 꽃은 산 그림자 드리워진 화단을 환하게 밝혔다. 소복이 쌓인 눈처럼 환했고 좀 과장을 하자면 꽃밭 위에 백열등 하나 밝힌 듯했다. 하얀 계집애의 얼굴이 떠올라서 더욱 좋았다. 아이들 틈으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발갛게 상기되던 얼굴은 달처럼 고왔다. 어쩌다 들리는 목소리는 맑은 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들었고, 스치듯 입가에 담던 미소는 아침햇살이 따로 없었다. 환한 꽃송이 바라보다가 그런 그녀를 떠올린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유치해서 닭살이 돋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꼭꼭 쟁여두고서 몰래 꺼내 봐야만 하는 마음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 안 되는 비밀이었고, 손가락 걸고 맹세안 둘만 의 비밀이었다.

달처럼 곱게 핀 백합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는 백합꽃 향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달을 닮아 희고 고운 그 꽃송이가 꼭 널 닮았다고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마당을 서성이던 휴일의 아침은 그래서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른다. 꽃잎을 막 피워내기 시작한, 그래서 가장 맑고 깨끗한 얼굴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피어나기 시작한 꽃이 질까 싶은 얼토당토않은 방정을 떨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말이 사람을 잡는다고 모를 일이었다.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와 꽃가지를 죄다 꺾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만에 하나라는 확률도 굳이 따지자면 경우의 수에 포함되는 확률이었다. 서둘러 낫 하나를 찾아들고 화단 가득 핀 백합꽃을 살폈다. 이왕이면 더 곱고 예쁜 꽃을 골라 선물하고 싶었다. 보기에 멀쩡하다 싶은 꽃도 애벌레의 습격에 구멍 하나쯤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라서 꽃송이 하나하나 들춰가며 꽃을 베었다. 꽃을 베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혹여라도 꽃송이 하나 다칠까 싶어서 금이야 옥이야 노래를 불렀다. 제법 풍성하게 곱게 베어낸 꽃을 마루에 내려놓고 꽃을 감쌀 종이를 찾았지만 그럴싸한 종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꽃다발을 묶을 일이 없었으니 포장지가 없는 게 당연했다. 당연했지만 막상 눈에 띄는 종이가 없자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화를 낸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없던 포장지가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질 일은 없었다. 난감했다. 두리번두리번 아무리 눈을 옮겨가며 찾는다 해도 없는 것은 없었다. 그때 겨우 눈에 들어온 것은 마루 한 귀퉁이에 굴러다니는 신문지가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급한 대로 신문지에라도 둘둘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신문지로 둘둘 말았다고 해서 백합꽃이 호박꽃으로 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신문지 곱게 펴 둘둘 말은 꽃은 제법 풍성했다. 알록달록 예쁜 포장지로 멋을 부린 꽃다발은 아니었지만, 내미는 손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꽃은 여전히 곱고 향기는 넓은 마당을 채우고도 남았다. 서둘러 자전거의 뒷자리에 꽃을 묶었다. 계집애가 있는 시내까지는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고 들판 사이로 곱게 난 길을 한참을 달려야만 했다. 개울을 따라 뻗어있는 길은 제법 바람이 시원할 터였다. 운이 좋아 먼지를 일으키며 오가는 자동차를 피할 수만 있다면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을 거였다. 울퉁불퉁 패인 비포장도로는 초여름의 햇살에 열기를 더하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꽃다발을 안고 수줍게 미소 짓는 계집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미소가 번졌다. 페달을 밟는 종아리에 힘이 들어갔다. 언덕을 미끄러지는 자전거는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까. 느릿느릿 되새김질을 하며 걷는 소걸음이 따로 없었다. 자전거는 삐그덕거리며 걷는 우마차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삐그덕 삐그덕 저만큼 뒤처진 자전거가 한가로웠고, 마음만 급한 나는 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이놈의 자전거야? 제발 달려라 씽씽....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계집애가 사는 집을 바라보았다. 약속을 하고 달려온 것이 아니라서 무작정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대문을 두드려 불러낼 용기는 없었다. 이렇게 바지랑대처럼 뻗치고 기다리다 보면 한 번쯤은 대문 밖을 나오지 않을까. 꽃이 다 시들기 전에 제발 나와라! 주문을 외며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볼까 싶어서 꽃다발은 뒤춤에 몰래 감췄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딴청을 부리며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멀리 우체국 지붕도 쳐다보았다. 애먼 길바닥을 운동화로 쓸어도 보고, 부스럭 소리를 내는 신문지도 만지작거렸다. 아는 사람을 만나지나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다림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운이 좋으면 분명 대문을 빼꼬미 열어젖히며 나오는 계집애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계집애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뭐 할 수 없지. 아깝지만 오던 길가 어디쯤에다 버리고 가면 그만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말 계집애가 대문 밖으로 왔다.

"어? 어쩐 일이야? 언제 왔는데 이러고 있어. 왔다고 부르지 그랬니?"

계집애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아, 그게 있잖아? 네게 줄 게 있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고는 뒤춤에 감췄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백합꽃이 얼마나 예쁘게 피던지.... 네게 주고 싶었어...."

그게 전부였다. 꽃을 주었으니 그만 가겠다는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고, 꽃다발을 받아 든 계집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했다. 달처럼 하얗게 핀 백합꽃 한 다발 가슴에 안고 쪼르르 달아났다. 여린 문틈으로 계집애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전 04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