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by 이봄

얼추 봄의 끝물이었을까? 한낮의 햇살은 뜨겁고 부는 바람도 덩달아 후텁지근해서 그늘을 찾게 되는 때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오래된 기억이라서 드문드문 이가 빠진 구닥다리 접시 같은 시간이다. 유행이 지나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오래됨이 있었지만 누군가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보게 되는 시간이다. 길가에 늘어선 아까시나무의 꽃이 한바탕 눈처럼 내려 거리를 몰려다녔다. 구르는 낙엽에도 까르르 배꼽을 잡던 아이들은 삼사오오 섬처럼 드리워진 그늘에 앉아 그들만의 봄을 만끽했다. 나뭇가지만 앙상하던 숲은 봄꽃을 피우고 이파리를 키워내더니만 하루가 다르게 초록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떼로 몰려다니며 골목을 기웃거리는 아이들처럼 나무들도 떼로 흔들려 파란 물결을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깊은 산에서 시작해 골짜기를 지나서 마을까지 닿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쏴아아 불어 가는 바람에 숲은 한 방향으로 누워 파도처럼 밀려갔다. 이제 막 움튼 연한 연두색과 겨우내 홀로 당당했던 솔잎의 진초록이 한데 섞여 회오리치기도 했다. 빙글빙글 동심원을 그리며 봄은 움트고 꽃을 피웠다. 굳이 입을 삐죽 내밀고 토라질 이유는 없었다. 키보다 높은 담장을 두르고 더는 다가오지 마라 위협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담장의 이쪽에는 하얀 살구꽃이 피었고, 담장 너머에는 연분홍 복숭아꽃이 수줍게 피는 게 봄날이었다. 두 볼 발그레 붉히며 계집애가 지나가면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사내 녀석은 밤을 밝히고야 말았다.

알지 못했다. 느닷없이 심장이 콩닥거리면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고, 이웃한 계집애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고 입안 가득 마른침이 고였다.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는 또 어찌나 크던지 그 소리에 놀라 소스라칠 지경이었다. 젖니가 다 빠지고 수염이 제법 거뭇거뭇 돋아날 무렵부터였을까?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울대에 전에 없던 복숭아씨 하나 달라붙어 오르내릴 때부터였을까? 꽃은 예뻤고 향기는 정신이 아득하게 향기로웠다. 집을 나설 때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도 그쯤이 아니었을까. 지천으로 피었던 진달래가 자취를 감추고 무리 지어 피었던 찔레꽃이 질 무렵에 사내 녀석은 새벽 시간을 서성이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동동 구름처럼 떠다니는 계집애를 떠올려 싱겁게 웃기도 했고, 편지랍시고 쓰다 구겨버린 애먼 종이들만 날벼락을 맞았다. '순이에게' 이름 한 줄 적어놓고 손은 얼어붙었다. 구구절절 말들은 산처럼 쌓였는데, 말들은 머릿속을 맴돌 뿐 도저히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아. 이런 젠장할....' 구시렁구시렁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이 입술에 매달려 난장을 쳤지만 그게 전부였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따가웠고, 말 한마디 제대로 쏟아내지 못한 가슴은 돌덩이 하나 올려놓은 듯 답답했다.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았고, 두 눈 동그랗게 뜨고서 머리를 쥐어짜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서 해결책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숲길을 걷다가 뱀이라도 만난 듯이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온갖 수다를 떨던 계집애가 하루아침에 인사말 하나 건네지 못할 낯선 얼굴로 다가왔다. 멀리서 계집애의 모습이 보이면 숨기에 바빴다. 담장 뒤에 숨어 계집애가 멀어질 때까지 꿩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멀어지는 발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훔쳐봤다. 혹시 내가 숨는 것을 보기라도 했으면 어떡하지? 아닐 거야? 그렇게 재빠르게 숨었는 걸 어떻게 봤겠어.... 울그락 푸르락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이 변덕을 부렸고,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일순간 말들이 뒤섞여 온통 까맣게 변하다가도 무엇 하나 남지 않은 백지로 변하기 일쑤였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은 주책맞게 두근거렸고, 아는지 모르는지 두 갈래로 따은 계집애의 갈래 머리가 우쭐우쭐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몰래 숨어 훔쳐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무슨 큰 죄라로 짓는 듯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계집애의 얼굴은 몰라보게 뽀얗게 변했고 가슴은 눈에 띄게 봉긋 솟았다. 입술은 봉숭아 꽃물이라도 들인 것처럼 붉어 예뻤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희고 고왔다. 귀동냥으로 훔쳐 듣는 목소리는 매끄러운 사과처럼 향긋해서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변한 게 아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에 한바탕 쏟아지던 소낙비처럼 갑작스러웠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쏴아아 요란을 떨며 불어 가는 소낙비는 먼산에서 시작돼 순식간에 마을을 덮치고는 멀리 달아났다. 길을 걷다가 맞닥뜨리는 소낙비처럼 계집애의 변화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런 계집애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 가득 계집애의 얼굴이 떠다니는 것은 더더욱 놀랍고 짜증스러웠다. 모기에 물린 손가락은 긁어도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듯이, 어쩌면 사내 녀석은 모기에 물린 손가락을 밤새도록 긁는다고 생각했다. 벌겋게 부어오른 손가락을 긁었다. 마무리되지 않는 편지를 붙들고 씨름을 했고, 끝도 없이 떠오르는 계집애를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사내 녀석의 작은 창은 새벽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황소 두어 마리 바짝 고삐를 틀어쥐고서 돌아왔어야 했다. 울끈불끈 팔뚝에 힘줄이 솟고 종아리는 터질 듯이 단단해졌을 시간이었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고, 땀방울은 비처럼 쏟아졌을 시간이었다. 끙끙 앓았다. 계집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이미 힘겨운 씨름은 시작되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심호흡 깊게 하고서 볼펜을 움켜잡았다. 멋진 문구가 나올법한 책들은 모두 꺼내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여기서 한 줄, 저기서 두 줄 고운 말들을 잘라다가 짜깁기를 했다. 봄볕이 어떻다느니 너스레를 떨다가 느닷없이 가을바람이 참 시원하고 상쾌했다는 식의 두서없는 글이 낯짝 두껍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온갖 미사여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놓지를 않았다. 아는 말들과 남들의 그럴듯한 말들이 뒤섞여 피아 구별이 없었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생각나는 말도 없었고 빈약하고 어색한 생각들로는 단 한 장의 편지도 끝낼 수가 없었다. 남의 말이라도 빌어다가 내 것 인양 허풍이라도 떠는 게 낫겠다 싶었다. 굵은 땀방울을 비 오듯 쏟아가며 겨우겨우 편지 한 장을 손에 쥐던 날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꼬박 밤을 새우고서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뿌듯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작은 우체국에 들러 우표 한 장을 샀다. 행여나 떨어질까 싶은 마음에 풀을 잔뜩 칠해 봉투에 붙였다. 편지 투입구를 바라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선뜻 편지 투입구에 편지를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애지중지 품에 품은 말들이 거기에 있었다. 계집애를 향한 마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고, 떨리지만 끝내 전하고 싶은 열정이 한낮의 햇살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퇴짜를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의 마음이 있었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부끄럽고 창피해도 계집애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전하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편지를 밀어 넣었다.

소낙비 요란을 떨며 내리던 날에 마치 번개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며칠을 뜬눈으로 보내야만 했다. 잠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기척도 없었고 덩달아 달아난 입맛으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모래를 씹어도 달게 느껴질 나이라고 했지만 어쩐지 입은 쓰기만 했다. 계집애는 이런 마음을 알기나 할까? 어쩌면 편지를 받아보고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로 염장을 지를지도 모르겠다. 또 모르겠다. 아예 뜯어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쓰레기통에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떤 얼굴로 마주칠지 모르겠지만 이미 편지는 내 손을 떠났으니 도리가 없었다. 길게 옆으로 찢어진 편지 투입구로 편지를 밀어 넣는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은 손을 떠났고, 결과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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