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몽글 꽃이 피고

by 이봄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자꾸 무언가가 팔꿈치를 치는 거야. 친다기보다 간지럼을 태우듯 쓰다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옆을 돌아봤더니 살랑이는 바람에 망초대 하나 흔들리고 있었어. 잣나무와 산수유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담장에 기댄 넝쿨장미가 그나마 열린 공간을 채우고 있었지. 그러니까 그늘에서 키를 키운 망초꽃은 보잘것 하나 없었어. 겨우 제 몸 하나 버티고 서 있었다고 해야겠지. 벤치 쪽으로 반쯤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하얀 꽃송이 몇몇을 피워내고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어. 담장에 늘어선 붉은 장미는 향기를 더해 한껏 거들먹거리고 있었는데, 비쩍 마른 줄기에 성긴 꽃잎을 매달고, 갖은 아양을 떤다고 한들 과연 누가 바라보기나 할까 싶더라고. 그래서 그랬을까? 톡톡 툭툭 바람의 힘을 빌어 팔을 건드렸던 거야.

"보시어요? 보시어요?"

개망초는 남자의 시선이라도 느꼈는지 더 바삐 팔뚝을 건드리고 있었어. 나도 예쁘게 꽃송이를 피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지. 하는 짓이 예뻐서 굳이 팔을 빼지 않았어. 오히려 한 뼘쯤 더 가까이 팔꿈치를 넣었지. 그냥 매몰차게 팔을 빼며 일어서기가 미안했다고 할까. 그런 거 있잖아. 누군가 내 말을 자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나 민망함 같은 거.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수줍게 내밀던 손이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러울까 싶었어. 아무리 말 못 하는 들풀이라도 분명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거야.

"얘야? 지금 날 부르고 있었던 거니? 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면 얘기해 봐. 괜찮아"

옆으로 몸을 고쳐 앉은 남자가 눈을 맞추고 얘기했을 때 망초꽃은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하얀 꽃잎을 발그레 붉히며 얘기를 꺼냈어. 목소리는 작았고 의기소침한 모습이 역력했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어.

"아저씨 보시기에 제 모습이 어때요? 그렇게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얼굴인가 싶어서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어.

"아니, 그렇지 않단다. 넌 지금 충분히 예쁘고 곱단다. 가끔 무리 지어 핀 망초꽃을 보고 있으면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듯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금 그 얘기가 정말인 거죠? 아저씨처럼 얘기해 주는 게 처음이라 믿기지가 않아요"

"그럼, 정말이고 말고. 이 아저씨가 뭣하러 네게 거짓말을 하겠니? 얘야? 믿어도 돼"

정말 그랬어. 밭둑이나 버려진 땅에 무리 지어 핀 망초꽃을 보면 꼭 눈이 내린 거 같다고 생각을 했지. 때로는 한 무리의 나비가 떼 지어 날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한참을 바라보고는 했거든. 이름도 없는 들풀에도 마음을 빼앗기게 마련인데 뭐 망초꽃은 어엿한 이름도 있는 걸.

"그래도 있잖아요. 저는 제 이름도 못마땅하거든요. 사람들이 가끔 제 이름을 갖고 놀리기도 하고 그래서요"

아저씨도 어릴 때 놀림을 받고는 했어. 이름이 좀 촌스럽고 어째 계집애들 이름에나 어울릴 거 같은 '춘' 자가 들어가서 말이야. 남자가 하하하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어.

"아저씨 이름은 래춘이란다. 이래춘! 웃기지? 아저씨 태어난 날이 이월 그믐이거든. 그래서 내일이면 봄이 온다고 來春이라고 지었다는구나 글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하거나 나쁜 이름도 아니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고, 향기가 없다고 기죽어할 필요도 없다며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하기도 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나 흘렀다 싶었을 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어. 잘 지내란 말과 함께 예쁘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말이야. 녀석과의 짧은 대화에도 시간은 몇 발의 길이만큼 흘렀듯, 물끄러미 개망초 하얀 꽃 바라보다가 계절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하게 되더라고. 굳이 달력을 찾지 않아도 계절을 나누는 것들이 있어. 개망초 하얗게 꽃이 피기 시작하면 묻고 따질 것도 없이 여름의 문턱이구나 하면 그만이야. 들에서는 한참 모내기로 바쁠 테고, 개울가 덤불에선 떼 지어 찔레꽃이 날갯짓을 할 거야. 적당한 바람이라도 불면 꽃들은 하얀 날개를 활짝 펴고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거야. 어쩌면 개울가 모래톱에선 할미새 몇 마리 짝을 짓느라 해가 짧기도 하고 말이지.


부르는 이름이 뭐냐에 따라 보지 않아도 뇌리에 각인되는 느낌이 있기도 해. '개망초'라는 이름도 사실 썩 좋은 느낌은 아닌데 녀석은 한때 '亡國草'라 불리기도 했다더라고. 국운이 다해 나라가 망해가던 무렵에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외래종 풀 중 하나가 개망초여서 나라가 망한 꽃이라고 했다더군. 물론 풀꽃이야 무슨 죄가 있겠어. 그저 하필이면 그때에 들어와 하얗게 무리 지어 피었을 뿐이지. 이유도 모르는 원죄를 머리에 이고 피는 꽃이 개망초란 녀석이야. 언제 한 번이라도 인간사에 끼어들어 난장을 친 적도 없는데, 덤터기를 쓰는 경우가 있듯이 꽃 이름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던 거겠지. 생각해보면 그렇더라고 사람 사는 일도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 가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하고, 반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을 잡게도 되더라고.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쓴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같아. 너무 억척을 부리며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솔잎만 뜯어먹으며 산다는 도인처럼 넋을 놓을 일도 아니야. 물 흐르듯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만 한다면 흐르는 거야. 바람으로 불어야 한다면 불면 그만인 거고. 사납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도 그렇고, 몸짓도 그랬으면 해. 악다구니를 써가며 발톱을 드러낼 이유가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차지한 것들이 과연 얼마나 향기로울지 생각해 볼 일인 거야.

입에 달고 사는 말들이 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내 모진 말들이 만든 상처는 죽을 때까지 흉터로 남을 터야. 향기롭거나 아름답기까지는 바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악취를 풍기거나 눈살 찌푸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혀를 둥글게 모아 내쉬는 숨은 동글동글 뱉어지고, 혀를 모나게 꺾어 뱉는 숨은 벌려진 입술을 빠져나가면서도 상처를 낸다고 해. 결국은 상대를 찌르기 위한 내 말들이 고스란히 내게도 비수가 된다는 말이겠지.

몽글몽글, 동글동글, 빙글빙글, 생글생글, 뭉게뭉게....

말은 사납지 않았으며 몸짓은 날카롭지 않아 부드럽고, 우아했다'라고 표현하듯 비수 하나 가슴에 품고 잔뜩 긴장하고 웅크린 몸뚱이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돌지도 못했고, 강물처럼 넓은 품으로 채우고 넘쳐흐르지도 못했지. 상처되지 않는 말들이 상처되지 않는 몸짓을 만들고, 결국에는 보듬어 치유하는 향기를 품게 마련이야. 말이 갖는 힘이고 사람의 본성을 보여주는 창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믿어. 꽃송이 하나 바라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말이 그렇고, 먹물 적셔 쓰게 되는 말이 또한 그렇더라고. 비지를 걸러낸 콩물을 뭉근하게 졸이다가 적당하다 싶으면 또르르 부어주는 간수에 가마솥에선 하얗게 순두부가 피어나지. 부뚜막에 앉아 순두부 피는 걸 보고 있으면 가을 하늘에 뭉게뭉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거 같아. 몽글몽글, 나무 주걱으로 저어주는 결대로 그렇게 꽃으로 피고 구름도 되는 거야. 내 말들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어. 남자가 망초꽃에 어울릴 만한 말을 찾다가 떠올린 말이야. 모나지 않아 부드러운 순두부 같은 말. 몽글몽글 가슴에 맺히고야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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