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초등학교 담장에 기대 핀 제비꽃을 보았어. 꽃다지며 냉이꽃처럼 키가 작은 녀석인데 꽃은 희거나 연한 노랑이 아닌 보랏빛 짙은 꽃송이를 달고 있었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봄을 알리는 녀석이야. 허리를 숙여 눈에 담았어. 그리고는 이내 예쁜 너를 떠올렸어. 무조건적인 반사야. 굳이 너를 먼저 떠올려 생각하는 게 아닌 그냥 예쁜 걸 보면 자동으로 네가 생각이 나는 그런 거. 꽃도 예쁘고 그보다 더 예쁜 네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예나 지금이나 설레는 마음을 주는 것들이 있어. 길을 걷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예쁜 꽃과 마주친다든가, 이른 새벽 창가에 앉아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에 눈을 뜬다든가 하는 거. 뜻밖의 행운이라서 더 마음이 설렜던 거 같아. 부는 바람에 향기를 묻혀가며 흔들리던 소나무며, 소리만큼 맑게 흐르던 골짜기의 시냇물도 마찬가지로 쿵 하고 심장 떨어지는 느낌을 줬어. 어디 손꼽자면 끝이 있을까 싶게 많은 것들이 예쁜 몸짓을 했지.
문방구의 한 코너를 꾸민 종이 앞에 서는 것도 그런 떨림이었어. 킁킁 기분 좋은 종이 향기라니? 심장이 벌렁거렸다면 지나친 말일까? 모르겠어. 난 그런 느낌이었거든. 서점에 들렀을 때 나를 압도하는 새 책들의 냄새와 인쇄기 돌아가며 뿜어내는 종이 냄새와 뒤섞인 잉크냄새도 그랬던 거 같아. 떨림이고 설렘이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냄새였어. 종이도 나무니까, 숲의 이야기와 그 속에 사는 녀석들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어. 펜을 쥐고 앉아 있으면 재잘재잘, 두런두런 이야기가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 귀 기울여 듣다가 끄적끄적 주절거리는 나를 만나게 되지.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한데 섞어 비벼내는 것보다 더 요란하고 대단한 것을 만났어. 위험한 존재야. 잠을 쫓아내고 생각을 빼앗아 멍 때리게 만들기도 해. 예전 어른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바보상자라고 했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것만 들여다보고 앉아서 바보처럼 실실 웃음을 흘린다고 그랬을 텐데, 나는 그보다도 더한 바보상자를 끼고 사는지도 모르겠어. 시도 없고 때도 없는 바보놀음에 빠진 거겠지. 어쩌겠어. 그냥 이것도 팔자려니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뾰족한 뭐가 없더라고.
펜을 들었다 놨다, 만지작만지작 한 시도 종이를 손에서 떼지도 못하는 엉거주춤 난리를 치다가, 휴 하고 숨을 길게 내뱉고는 다시 또 반복하게 되는 거, 생각이야. 밑도 끝도 없는 너 생각이야. 동동 머리에 띄운 너에게 말도 붙여보고, 보드라운 너의 손을 그리다가 콩닥대는 심장도 한 번 쓸어야만 하는 생각. 홀로 지새우는 밤은 그래서 시끄럽고, 불 꺼진 깜깜한 방인데도 야단스럽게 불을 밝혀 환하기도 해.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불러다가 우스꽝스럽게 짝을 짓고는 오호라, 제법 어울리는 조합인 걸 하며 억지도 부리지. 싱숭생숭 바람이 시끄러운데 뭔 짓이면 또 어때? 한바탕 난리굿을 피운 끝에도 역시나 싱그생긋 나를 바라보며 웃는 너는 어여뻤어. 봄밤은 화사하고 꽃들은 향기를 더했지만 어디 너만 할까. 나는 너의 미소 하나면 봄날의 꽃대궐도 마다할 거야. 삭풍이 부는 겨울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테고....
어여쁜 네게 장문의 편지를 쓰고 싶어. 말이 부족할지도 모르겠고, 종이가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은 끝이 없는데 내가 아는 말이 턱없이 부족할 거 같아. 밤이 길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긴 고백의 말을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