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잠에 취해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다가 허리가 쑤셔서 일어났다가 캄캄한 창문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을 거야.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있을 그날의 당혹감은 뭐라 설명하기에도 난해하고 당황스러웠어. 잠이 채 달아나지 않은 눈을 몇 번이고 비벼가며 재차 삼차 시간을 확인했지. 그랬음에도 달라지는 건 하나 없었어. 아침이 훤하게 밝았을 거야 하는 기대가 잘못이었을 뿐이야. 날은 여전히 어두웠고 잠은 달아났다는 거 하나만 덩그마니 앉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어.
그런 날에는 시간은 거북이처럼 느려터지고, 그런 거북이 한 마리 지켜보다가 알아서 복장이 터졌지. 고운 임 기다리듯 창가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서성이던 발걸음이면 못해도 서울에서 천안쯤은 가고도 남았을 거야. 환장할 노릇이란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겠다 싶었지. 안성맞춤이 따로 없었어. 그렇게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떡하니 길을 막아서면 당황스럽고 순간 머리가 하얘지기도 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무방비의 시간이야.
파리 한 마리 입에 물고서 눈을 꿈쩍이는 두꺼비처럼 눈이라도 꿈적여서 정신을 차려야지 별도리가 없어. 이왕지사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 부지깽이 라도 들고 멍한 순간을 내쫓아야지. 멍한 순간엔 뭐라도 해야만 해. 우스꽝스러워도 좋고 바보스러워도 나쁘지 않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미련한 건 없어서 그래.
십수 해도 더 된 일이야. 볼일이 있어서 평택을 다녀오는 길이었어. 여름날이었지.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서울로 향하고 있었는데 멀리 보이는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으로 뒤덮이더라고.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겠구나 했지.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후둑후둑 빗방울이 앞유리를 때렸어. 그때까지는 몰랐어. 늘상 보아오던 소나기려니 했을 뿐이야. 웬걸? 조금 있으니 바가지로 퍼붓더라고. 와이퍼의 속도를 올려 빗물을 쓸어내었어. 잔뜩 높였던 자동차의 속도를 낮추고 천천히 운전을 하는데 늘어선 차들이 하나 둘 비상등을 깜빡이더라고. 물론 나도 시야가 좋지 못해서 서행을 하고 있었지. 그것도 잠시였어. 바가지에서 양동이로 바뀐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졌어. 운행불가! 끝도 없이 늘어선 차들이 모두 멈췄어. 빨간 비상등만 하릴없이 점멸하고 있었고, 정신없이 팔을 휘젓던 화이퍼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에 서서 내리는 비만 하염없이 바라보았어.
한 삼십여 분이 흘렀을까? 콸콸콸 불어난 계곡물처럼 흐르던 빗물이 잦아들고 여명이 밝아오듯 하늘도 훤해지더라고. 소나기가 이렇게 요란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 난생처음 겪는 물폭탄이었어. 차에 앉아 있는데 스멀스멀 불안해지고 나중엔 무섭기까지 하더라니까.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거짓말 같았어. 아니 거짓말이었는지도 몰라. 후둑후둑 빗방울이 잦아들더니 이내 말갛게 갠 하늘이 방긋 웃더라니까. 귀신에 홀린 듯이 멈춰 섰던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차창에 들러붙은 빗물을 쓸어내고 있었어. 있던 길이 사라지고 없던 주차장이 나타나기도 하는 황당함이랄까.
근데 있잖아? 사는 것도 그렇더라고. 길은 늘 거기에 있지 않았어. 눈이 쌓이고 안개가 장막을 드리워 없애기도 하는 거야. 어쩔 수도 없어. 스스로 길을 지우는 일도 종종 벌어지고, 도깨비가 나타나 뚝딱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기는 해. 변화무쌍 종잡을 수 없는 길이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거야. 길이 없어도 그렇고 어두워도 마찬가지야. 뚜벅뚜벅 잔뜩 졸음 묻은 걸음이라고 해도 걸어야만 해. 삶은 늘 그래.
아, 등 떠밀어 나를 앞에 세우지는 마. 나는 있잖아 갈팡질팡 어디로 뛸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 뒤를 졸졸 따르지도 말고 내 발자국을 혹여라도 길이려니 생각지도 말아 줘. 노파심에 하는 말이야.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만한 걸음이 아니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