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맘때였을까?

by 이봄


아마 요맘때였을 거야. 그날은 이슬비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지. 바람은 얌전히 불고 커다란 연잎은 또르르 고인 빗물을 쏟아냈어. 꼬맹이들 주먹만 한 꽃봉오리가 연밭에 가득했던 거 같아. 며칠만 더 지나면 연꽃이 피겠구나 했던 기억이 있네.

조용했고 차분했지. 시끌벅적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아니었지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며 소풍 나온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웃음 짓게 하는 연못이었어. 한낮의 뜨거운 햇살에 대거리라도 하는지 개개비란 녀석 어찌나 시끄러웠나 몰라. 키가 큰 갈대에 앉아 뭐라 뭐라 떠드는 꼴이 우습기도 했어.

연못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고즈넉했고, 받쳐 든 진달래빛 고운 우산이 나풀나풀 날고 있는 것만 같았어. 우화를 끝낸 나비의 날갯짓이 어쩌면 이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나란히 걷다 말고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싶었어. 조금 뒤처져 바라본 너는 는 꽃이었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도 모르게 '예쁘네!' 탄성을 자아냈지.

주책인가? 뭐 그럴지도 몰라. 주책이면 어때? 주책을 떨어서 한바탕 웃을 수 있다면 열 번이라도 주책을 떨 거야.

"있잖아? 넌 처음 우리 알게 된 그때처럼 여전히 예쁘고 고와!"

얘기를 하면 넌 언제나 발그레 얼굴 붉히면서 그랬지.

"어머머.... 얘는? 남들이 들으면 주책이라고 흉보겠다. 호호호"

사실인데 어쩌겠어. 넌 여전히 예쁘고 상냥한 사람이야. 세월은 너만 비껴가고 이렇게 바라보는 나는 팔불출 자랑질에 흐뭇한 걸 뭐. 바가지로 주책을 퍼올려 쏴아 정수리에 쏟는다고 해도 그게 난 좋아.

까만 오디 하나 똑 따서 입에 넣은 날이었어. 오디는 달콤했지. 달콤한 맛도 맛이겠지만 지금처럼 새벽을 채워주는 이야기 같은 맛이구나 하게 돼.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방금 뭘 먹었는지 시치미를 뗄 수 있는 과일이 아닌 거지. 여기저기 흔적이 어지러운 녀석이 오디인 거야. 농익은 오디는 쉽게 터져서 손가락에도 검붉은 흔적을 남겼고, 혓바닥이며 입술 주위에도 그랬어. 잘못하면 옷에도 잔뜩 오디의 검붉은 물을 들이고는 했던 거 같아.

새벽 이른 시간에 깨어날 때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억들이 꼭 오디를 닮았구나 싶기도 한 이유야. 쉽사리 삼켜 지울 수 없는 추억이야. 일부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숨기고 싶다거나 잊고 싶은 기억이라면 그것도 낭패겠지만,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그래서 이렇게 반추하고 싶은 기억이라면 하얀 티셔츠에 물든 그 오딧물이 반갑고 좋아. 혼자라도 빙긋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마치 오래된 수필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잔잔한 이야기라서 좋은 그런 거. 시끄럽고 야단스러운 이야기는 이 새벽과는 좀 이질적인 거 같아서 제대로 스며들 수가 없을 거야. 나 따로 이야기 따로 서로를 흘겨보다가 끝내는 벌겋게 충혈된 눈만 남겠지만, 나의 추억은 온전히 스며 미소 짓는 새벽을 선물하거든.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배를 깔고서 쌔근쌔근 잠든 기억이야. 따뜻하고 포근한 기억들....

"어머머! 얘는? 그걸 옷에 닦으면 어떡하니? 다 묻잖아...."

화들짝 놀라 너는 눈을 흘기고, 나는 깔깔깔 웃으며 손에 묻은 오딧물을 옷에 쓱쓱 닦아냈던 시간이었어.

"뭐 어때요? 빨면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개구쟁이 소년은 옷을 빨지 않았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 이렇게 가끔 떠올려 웃는 걸.

아, 이런.... 방금 개구리 한 마리 풍덩 연못에 뛰어들어 고요를 깨네. 어쩜 소리도 요란하고 동글동글 파문을 만들었어.

"고놈의 개구리 새끼를.... 하하하"

싱거운 새벽이 희뿌옇게 밝았구나. 개구리는 풍덩 연못에 뛰어들고, 나는 또 그보다 더 요란하게 풍덩 은경이 너에게 뛰어들었어. 조용하고 시끄러운 새벽이 밝았네.

"그대, 오늘도 행복하시라!"

말을 남기고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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